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총장 이건우)은 엄지원 뇌과학과 교수 연구팀이 자폐스펙트럼(ASD)이나 강박장애(OCD) 등 반복행동장애를 유발하는 원인과 분자 작동 원리를 규명했다고 12일 밝혔다. 연구팀은 뇌 속 면역세포의 염증 반응이 특정 수용체의 과활성을 유도해 환자에게서 나타나는 의미 없는 반복행동이 유발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문이 제대로 잠겼는지 반복해서 확인하거나, 손을 여러 번 씻는 행동 등 이런 반복행동은 증상이 심해지면 자폐 스펙트럼 장애나 강박장애로 이어질 수 있다. 지금까지는 주로 신경회로 이상이나 유전적 요인이 원인으로 추정되었으나, 뇌 염증이 이러한 행동을 유발한다는 직접적인 연관성은 밝혀지지 않았다. 연구팀은 이번 연구를 통해 반복행동에 뇌 염증이 핵심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제시했다.
연구팀은 먼저 염증 반응을 유발하는 유전자인 'NLRP3' 유전자 돌연변이를 보유한 생쥐를 이용해 실험을 진행했다. 이 유전자는 뇌 내 면역세포인 '미세아교세포'를 자극해 만성 염증 반응이 지속되도록 한다. 그렇게 염증이 계속되면, 흥분성 신경전달에 중요한 'NMDA(N-methyl-D-aspartate)' 글루타메이트 수용체가 과도하게 활성화되며, 그에 따라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하거나 불안해하는 증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연구팀은 과도하게 활성화된 'NMDA' 글루타메이트 수용체가 반복행동의 원인이라는 점에 주목, 기존 알츠하이머병 치료제 중 하나인 '메만틴'이라는 약물을 'NLRP3' 유전자 돌연변이 생쥐에게 투여했다. 그 결과, 무의미한 행동을 계속 반복하던 증상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NMDA' 글루타메이트 활성도 정상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이어 연구팀은 뇌 염증이 'NMDA' 글루타메이트 수용체를 어떻게 자극하는지에 관한 실마리도 찾았다. 염증 상태의 미세아교세포가 '인터루킨-1베타(IL-1β)'라는 염증 유발 물질(사이토카인)을 분비하며 'NMDA' 글루타메이트 수용체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번 연구에 사용된 '메만틴'과 '인터루킨-1RA(상품명 아나킨라)'는 이미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은 치료제로, 현재 알츠하이머병과 류마티스 관절염 환자에게 사용되고 있다. 즉, 새로운 신약을 개발하지 않고도, 이미 안정성과 효능이 검증된 약물을 자폐증이나 강박장애 치료에 재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엄지원 교수는 “이번 연구는 만성 뇌염증이 NMDA 글루타메이트 수용체의 과활성화를 유도하고, 이로 인해 반복행동장애가 유발됨을 입증한 사례”라며 “반복행동을 주로 동반하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나 강박장애 치료에 새로운 치료 접근법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연구결과는 DGIST 뇌과학과 정혜지 박사가 제1저자로 참여했으며, 최근 과학학술지 '셀리포트(Cell Reports)'에 온라인 게재됐다. 이번 연구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연구재단의 기초연구실지원사업 및 중견연구자지원사업의 지원으로 수행됐다.
대구=정재훈 기자 jho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