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장사는 말 그대로 '공개된 관계' 속에 놓인 기업이다. 투자자라는 불특정 다수와의 관계는 썸을 타는 연애와도 닮아 있다. 처음엔 매력을 어필하는 단계로 시작되지만, 언젠가부터는 깊은 신뢰 관계가 되기도 하고 그러다 '이혼하기 어려운 부부'와 같은 애증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상장 직후 관심과 애정은 잠깐이다. 주가 상승이라는 보상이 주어질 때 비로소 '사귐'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소통이 끊기면, 관계는 언제든 흔들린다. 한때 기대를 걸었던 기업이 갑자기 아무 말없이 하락세로 접어들면, 투자자는 실망을 넘어 배신감마저 느낀다. 오랫동안 말을 아끼던 상장사는, 결국 말도 안 하는 부부처럼 이혼이라는 손절을 맞게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커뮤니케이션 지속성이다. 상장 이후 기업이 보여주는 말과 태도, 사소해 보이는 설명 하나하나가 관계 지속 여부를 결정한다. 누군가는 연애 중에도 보험 가입을 권유하는 친구처럼 느껴지고, 누군가는 헤어졌어도 다시 손을 잡게 되는 인연이 된다. 상장사의 대화법은 주가라는 감정선을 오가는 데 있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실적은 하락하고, 시장 신뢰는 흔들렸다. 국내 대표 소비재 기업인 LG생활건강은 2022년부터 시작된 연속된 위기 속에서도 눈에 띄는 변화를 보여주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말'의 전략이 더욱 정교해졌다.
회사는 △중국 시장 부진 △럭셔리 브랜드 성장 정체 △장기 재임한 CEO의 퇴진이라는 삼중고를 겪었다. 하지만 외부와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어느 순간에도 감정에 기울지 않았다. 시장을 향해 조급하게 해명하지 않았고, 임직원을 향해 비현실적인 희망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대신 “럭셔리 브랜드 집중 전략”, “글로벌 다변화”, “지속가능한 가치경영”이라는 몇 가지 키워드를 일관되게 반복했다.
그 키워드는 IR 발표자료, 연차보고서, 브랜드 슬로건, 광고 문구, 심지어 ESG 리포트까지 같은 톤으로 유지됐다. 불확실한 시기일수록 언어의 구조를 단순화하고, 설명의 방향성을 제한함으로써 '시장의 해석'을 통제하는 전략이었다.
이런 커뮤니케이션 전략은 결국 시장이 기업을 다시 해석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설명은 복잡하지 않았고, 방향은 흔들리지 않았다. 위기 상황 속에서도 장기 전략에 기반한 커뮤니케이션은 시장과의 신뢰를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방어막이 되었다.
LG생활건강이 위기 속에서 '말의 전략'으로 버텼다면, 포스코인터내셔널은 새로운 시장에 대한 '설명의 기술'로 기업 가치를 높인 사례다.
특히 2023년부터 본격화된 '친환경 에너지 포트폴리오 전환'은 단순히 사업 구조의 재편이 아니라, 기업 언어의 재편으로 읽힌다. 기존의 '무역 중심' 기업에서 '친환경 에너지 전문 기업'으로의 전환을 설명하면서, 회사는 구체적인 수치를 반복적으로 제시했다.
“2026년까지 LNG 밸류체인 투자 1조 5천억 원”,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비중 30% 이상 확대”, “BESSo풍력o태양광 분야의 연계 확장” 등은 반복된 메시지 속에서 포스코인터의 미래 전략을 구체화한 설명 장치였다.
이 회사의 특징은 큰 방향을 제시한 뒤, 그것을 해석 가능한 수치와 구조로 설명했다는 점이다. ESG 보고서, 투자자 대상 발표자료, 홈페이지, 심지어 보도자료까지 동일한 키워드와 구조가 반복된다. 이 일관성은 시장의 평가로 이어졌다. 2024년 한국IR대상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즉, 커뮤니케이션의 일관성과 구조화된 설명이 실제 시장에서 긍정적 평가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시장에서 신뢰를 잃는 기업들의 공통점은 '끊긴 설명'이다. 고의가 아니더라도 소통이 일시적으로 멈추는 순간, 투자자는 기업의 진심을 잊는다. '말하지 않는 기업'은 결국 '소통하지 않는 사람'처럼 오해받고, 낯설게 느껴진다. 이는 다시 시장과의 거리감을 만들고, 주가에 반영된다.
기업 커뮤니케이션은 단순히 홍보를 잘한다는 것과는 다르다. 진심은 느껴지되, 전략은 갖춰져야 한다. 말은 솔직하되, 구조는 있어야 한다. 연애가 그렇듯 기업과 시장의 관계도 감정과 설명이 함께 있을 때 지속된다.
사랑도, 신뢰도 결국 '말'로 지켜진다. 말하지 않으면 관계는 멀어지고, 그 공백을 오해가 채운다. 상장사에게 기업 커뮤니케이션은 주가보다 앞서야 할 '관계의 설계'다. 결국 투자자는 기업이 어떤 실적을 냈느냐보다, 그 실적을 어떻게 말하느냐를 먼저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