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과 일본은 애니메이션 기반 장수 지식재산(IP)을 지켜내며 산업 전반으로 확장해왔다. 반면 한국은 웹툰이라는 원천 IP를 꾸준히 창출하고 있음에도 애니메이션 제작·투자 기반이 취약해 장수 IP로 발전시키기 어렵고,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중심 유통 구조 속에서 산업적 환류에도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전문가들은 IP 주권을 지키기 위해 토종 플랫폼 강화, 창작자 육성, 수익화 경험 확대가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장수 IP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는 월트디즈니다. 디즈니는 미키마우스를 비롯한 슈퍼 IP를 활용해 지난해에만 86조원 규모의 상품 매출을 기록했다. 마블·스타워즈 등 IP를 테마파크, 머천다이징, 스트리밍으로 연결해 '콘텐츠 종합산업' 모델을 구축했다. 일본 역시 애니메이션을 토양으로 한 슈퍼 IP 전략을 통해 산업 경쟁력을 키웠다. 최근 국내 개봉한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은 10일 기준 406만 국내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 신화를 이어가고 있다. 귀멸의 칼날은 원작 만화와 애니메이션, 극장판, 머천다이징까지 확장하며 일본 장수 IP로 자리매김했다.
한국 현실은 사뭇 다르다. 글로벌 흥행 성과에도 불구하고 IP 산업화 기반이 취약하다. 유진희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겸임교수는 “한국도 IP 생명력을 길게 하는 것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효과적인 방법론으로 애니메이션이 거론된다”면서도 “넷플릭스발 경쟁이 치열해 단기간 성과가 요구되는 현실 속에서, 애니메이션 제작·투자 기반이 취약한 한국에서는 장수 IP가 나오기 어려운 구조”라고 설명했다.
오징어게임과 케이팝 데몬 헌터스처럼 세계적 주목을 받은 작품이 잇따랐지만, 제작비 대부분을 글로벌 OTT가 선투자하고 IP 권리와 부가가치가 플랫폼에 귀속되는 구조가 일반적이다. 웹툰 원작이 드라마·영화로 제작돼 단기 성과를 내는 경우는 늘고 있지만, 캐릭터·세계관을 장기간 활용하는 애니메이션형 슈퍼 IP로 성장시키는 데에는 제약이 크다.
국제 비교에서도 한국의 구조적 취약성이 드러난다. 다미안 탐비니 런던정경대(LSE) 교수가 올해 학술지 '텔레커뮤니케이션스 폴리시'에 발표한 '넷플릭스 효과 재검토: OTT, 미디어 세계화와 디지털 주권' 논문에 따르면, 호주는 넷플릭스 등 글로벌 OTT의 시장 지배력이 확대되자 △자국 제작물 일정 비율 편성 △투자 의무 규제를 도입해 국내 제작사 보호에 나섰다. 영국도 글로벌 OTT 확산이 방송 광고시장과 극장산업을 위축시킨다고 판단, 공영방송 지원과 함께 OTT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두 나라 모두 글로벌 OTT가 얻는 수익 일부를 자국 콘텐츠 생태계에 환류시키도록 강제한 것이다.
논문은 한국은 OTT 의존도가 심화되는 와중에도 여전히 자율·진흥 기조에 머물러 있어 제작사들의 협상력은 오히려 약화됐다고 분석했다. 한국이 넷플릭스 효과를 가장 크게 누린 국가지만, 역설적으로 제작사와 방송사의 산업 주권은 더욱 취약해졌다는 진단이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토종 플랫폼의 강화, 창작자 발굴·지원, IP의 다각적 수익화 같은 과제가 제시된다. 특히, IP 주권 확보를 위해서는 힘 있는 플랫폼이 핵심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플랫폼이 있어야 IP를 직접 지배·유통하며 수익을 온전히 확보하고, 글로벌 협상력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토종 플랫폼이 웰메이드 IP를 직접 유통한다면 부가가치를 국내 기업으로 환류시키고 다양한 산업으로 확장할 수 있다.
글로벌 플랫폼 독주 체제 속에서 한국 콘텐츠가 지속 가능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티빙·웨이브 합병을 더 이상 늦춰서는 안 된다는 전문가 제언이 나온다. 미디어산업평론가인 조영신 박사는 “현재 국내 미디어·콘텐츠 산업은 '그린 라이트'가 아니라 '데프콘 3'에 해당하는 긴장 상태”라며 “티빙·웨이브 합병은 국내 산업의 돌파구이자 최소한의 안전망이며, 넷플릭스에 잠식된 국내 미디어 시장의 콘텐츠 주권을 되찾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권혜미 기자 hyemi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