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은행이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통화정책 훼손 가능성을 강조하며 은행권 중심의 발행 모델을 제시한 가운데, 해당 접근 방식에 대한 반론이 제기됐다. 외국환관리법·고객확인제도(KYC)·자금세탁방지(AML) 등 기존 규제 논리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담보 자산 가치 실시간 연동을 위한 기술 인프라, 감시 체계까지 포함한 종합적인 설계가 우선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노진영 한국은행 통화정책국 정책제도팀장은 27일 서울 을지타워에서 열린 '제7차 싱귤래리티 금융 소사이어티(SFS)' 포럼에서 '금융통화시스템의 변화와 중앙은행의 과제'를 주제로 스테이블코인을 핵심 위험으로 제시했다.
그는 “토큰화 흐름이 가속화되면서 가시화된 핵심 위험은 스테이블코인”이라며 “통화성을 지닌 스테이블코인이 M2(광의통화)에 편입돼 통화량을 일대일로 증대시키고, 준비자산이 예금·국채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은행 유동성 지표가 약화하고 대출이 위축, 이중통화(two-tier) 체계 내 은행의 통화 창출 기능이 제약으로 통화정책 유효성이 저하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특히 스트레스 국면에서의 유동성 관리가 더 어려워진다는 점도 짚었다. 그는 “금융안정 리스크와 함께 코인런 가능성도 커진다”며 “사용자 저변을 넓히기 위해 자동화 대출, AI·빅데이터 기반 신용공급이 확대되면 평상시엔 효율이지만 충격 시에는 취약성이 증폭될 수 있다는 점을 국제통화기금(IMF)이 지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화폐의 단일성·무결성 훼손 우려도 제기했다. 노 팀장은 “스트레스 상황에서 반복되는 디페깅(탈동조화)은 단일성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고, 외환 불법 거래 용이성 증대는 화폐 무결성을 침해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2022년 테라·루나 사태 당시 테더(USDT) 0.95달러까지 밀렸고, 2023년 SVB 사태 때는 USDC가 한때 0.88달러까지 하락한 사례를 들었다.
기조 발제 이후 이어진 제7차 싱귤래리티 금융 소사이어티(SFS) 토론 세션에서는 윤종원 KDI 초빙연구위원(전 청와대 경제수석)을 좌장으로 한국은행의 문제 제기 방식과 제도화 접근에 대한 다각도의 반론과 대안이 제시됐다.
먼저 통화정책 유효성 저하라는 한은의 주장을 두고, 통화량 중심 사고방식이 현재 금리 중심의 정책 기조와 맞지 않으며, 스테이블코인만을 과도하게 문제시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김철웅 신한은행 상임감사위원은 “통화정책은 이미 금리 중심 체계로 전환됐는데, 통화총량 논리로 스테이블코인 리스크를 강조하는 건 현실과 괴리가 있다”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 중앙은행은 은행 기반 통화량 조절을 사실상 접고 양적완화(QE) 등으로 전환한 만큼, 한은도 새로운 유효성 확보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신관호 고려대 교수도 “통화정책이 금리 중심체계로 변했다는 점에 동의하며, 스테이블코인이 금리·유동성에 영향을 줄 수 있어 어느 정도 통화정책 유효성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지만, 이는 머니마켓펀드(MMF)·종합자산관리계좌(CMA) 등 다른 금융혁신도 마찬가지”라며 “스테이블코인만 문제시하는 것은 과도하게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코인런 등 다른 부작용을 더 들여다봐야한다”고 언급했다.
이에 대해 노진영 팀장은 “한은이 통화총량을 직접 통제하지는 않지만, 기준금리를 통해 은행권 신용 창출에 간접 영향을 미친다”며 “문제는 온체인 유동성처럼 모니터링·통제 밖에서 증가하는 영역으로, 가시성 저하가 정책 파급력을 약화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스테이블코인을 100% 지급준비로 운영하고, 준비자산을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나 예금토큰으로 구성하면 중앙은행이 실시간 모니터링과 통화 관리를 할 수 있지 않느냐”고 질의했다.
이에 노진영 팀장은 “준비자산이 CBDC·예금토큰이라면 우리가 우려하는 '비가시적 유동성(온체인 영역)' 규모를 실시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답했다. 다만 그는 “민간 발행사 입장에선 수익성 극대화를 위해 고유동성 증권 등으로 준비자산을 운용하길 선호해, 완전한 중앙은행 형 준비자산 전환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 관련 은행권 주도 모델을 두고도 타당성 논의가 이어졌다. 신관호 교수는 “외국환관리법 때문에 원화스테이블 코인을 은행 중심으로 가야 한다는 논리는 핵심을 비껴간다”며 “국내 거래소에서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매수해 해외 거래소로 이전하는 등 추적이 어려운 경로가 이미 존재하는데, 은행 중심 설계만으로 빈틈이 해소되는 듯 말해선 곤란하다”고 짚었다.
유재수 간사도 “미국은 스테이블코인 준비자산을 사실상 자산 격리(링펜스)해 운용을 제한하고, 온체인 결제는 T+0인 반면 은행은 매칭 구조상 T+1이어서 '즉시 결제용 돈'과 '일반 예금'이 나눠진다”며 “이 구조에선 규제·운영비용만 커지고 은행 참여 유인은 작다”고 짚었다. 고객확인제도(KYC)·자금세탁방지(AML) 논리만으로 은행 중심을 정당화하기보다, 예금토큰 활용을 대안으로 제시해야 한다는 얘기다.
다만, 은행권 중심 발행이 자금세탁 방지 등에서 더 효과적이라는 반론도 제기됐다.
윤종원 좌장은 “자금세탁과 탈세 추적(KYC·AML), 외환관리, 소비자 보호 등 여러 측면에서 은행권 중심 발행이 보다 효과적”이라면서 “미국에서도 비금융 기업의 발행은 매우 엄격히 심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노진영 팀장도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국내 실물 결제에 광범위하게 쓰이는 단계는 아직 아니고, 현재 논의의 초점은 원화 스테이블코인 규율”이라며 “자본유출이 심각하다고 볼 만한 활성 국면은 아니지만, AML·외환 규제 준수와 과도한 자본유출 방지 조항을 선제적으로 규정에 담아, 시장 확대 시 발생할 리스크를 예방하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이종섭 서울대 교수는 감시 체계의 전환을 주문했다. 그는 “전통적 KYC를 넘어 KYW(Know Your Wallet)·KYT(Know Your Transaction)로 가야 온체인 자금흐름을 제대로 포착할 수 있다”며 “은행이 발행 주체가 되더라도 유통 데이터의 상시 모니터링 설계와 이를 수행할 결제 사업자·핀테크와의 파트너십을 병행해야 한다”고 했다.
노진영 팀장은 “제도화를 통해 발행사의 보고를 의무화하거나 예금토큰·CBDC와 연동해 실시간으로 데이터가 들어오는 시스템 등을 감시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다”면서 “어떤 기술 방식으로, 어느 범위까지 데이터를 받을지 등 세부 설계는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종섭 서울대 교수는 스테이블코인 담보자산의 가격이 시장과 연동될 수 있는 인프라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그는 “미국의 풀 리저브형(Full-reserve) 스테이블코인은 자본시장 담보자산의 시가를 블록체인과 실시간으로 연동하는 PoR(Proof-of-Reserve) 시스템 구축이 시장 신뢰 유지의 핵심”이라면서 “이를 위해 체인링크(Chainlink) 등 가격 오라클(price oracle) 사업자와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 교수는 “국내에서도 예금 외 담보자산을 활용하려면 시가 정보의 실시간 온체인 연동과 발행 한도의 자동 제어를 스마트컨트랙트로 구현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점진적으로 설계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은행권 중심 모델이 혁신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이효섭 위원은 “규제가 강화되고 은행 중심 발행이 되면, 수익·리스크 최적화가 목표인 은행과 고객가치·확장이 목표인 빅테크의 차이로 중장기 경쟁력이 약해질 수 있다”면서 “모든 자산의 토큰화(RWA)로 간다는 BIS의 시나리오에서 한국이 뒤처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토큰화 시대에는 디지털 자산 간의 거래를 안정적으로 연결해 줄 기축 역할의 스테이블코인이 필수 인프라로 작용하면서다.

박유민 기자 newmi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