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부터 150조원에 이르는 국민성장펀드 자금 투입이 예고되면서 모험자본시장의 눈치 싸움이 치열하다. 회수시장 침체로 인해 그간 투자금을 배분하지 못했던 벤처펀드의 청산은 물론 신규 출자금 준비까지 대규모 자금 투입에 따른 전략 수립에 한창이다. 동시에 유망 벤처기업의 창업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대규모 자금이 외려 '독이 든 성배'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불거진다.
30일 금융권 및 신기술금융업계에 따르면 최근 중·대형 벤처캐피털(VC)을 중심으로 그간 청산을 미뤄왔던 벤처펀드의 수익금 배분 작업이 한창이다.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개시될 국민성장펀드 출자 사업에 대비해 기존 출자자(LP)에 투자 이익을 제공해 평판을 높이는 한편, 추가 운용여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올해 연말까지 만기 도래하는 벤처펀드의 규모는 8조원에 이른다. 8조원 가운데 3조6000억원 가량은 이미 펀드 만기일을 지났다. 코스닥 기업공개(IPO) 시장의 침체로 인해 만기를 연장한 펀드들이 대규모 자금 투입을 앞두고 속속 해산 결정을 내리고 있는 셈이다.
한 VC업계 관계자는 “코스피가 연일 최고가를 쓰고 있지만 정작 코스닥 시장은 별 움직임이 없는 만큼 시장이 완전히 양극화된 상황”이라면서 “내년부터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는 만큼 이미 내부수익률(IRR)을 달성한 펀드의 경우 빠르게 해산하고 다음 출자 사업을 대비하자는 차원”이라고 전했다.
기존 운용하던 펀드를 속속 해산하고 있는 만큼 신규 펀딩을 재개하는 VC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기업은행 등 정책금융기관을 중심으로 국민성장펀드 투입에 앞서 실시한 출자 사업에는 연일 신규 펀딩을 재개한 중·대형 VC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실제 기업은행이 최근 실시한 2025 IBK혁신펀드 K테크 부문 위탁운용사 선정에는 4개 운용사를 뽑는데, 총 29개 VC가 몰렸다. 6대 1에 이르는 경쟁률이다. 모태펀드 출자사업에 준하는 수준으로 VC의 수요가 컸다. 한동안 신규 출자 사업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던 VC들이 대거 참여한 영향이다.
이처럼 본격적인 자금 투입 이전부터 시장이 빠르게 움직이는 가장 큰 이유는 대규모 자금 투입에 따른 '쏠림현상'이 일찌감치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실제 내년부터 투입되는 150조원 규모 국민성장펀드 가운데 35조원은 벤처펀드 결성을 위한 간접투자에 쓰인다. 35조원 가운데 대부분은 인공지능(AI), 반도체, 바이오·백신 등과 같이 이미 특정 산업군에 투입해야 한다는 꼬리표가 달려 있다.
AI는 특히 투자 쏠림이 우려되는 분야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지금 시장은 그야말로 SK하이닉스 같은 글로벌 기업만 잘나가는 양극화 시장”이라면서 “마땅히 투자할 만한 국내 AI 창업 기업이 딱히 없는 상황에서 과잉 자금 공급은 필연적”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AI전용 펀드와 같은 꼬리표가 달린 자금을 무작정 받기보다는 후속 투자 등 포트폴리오를 고려할 수 밖에 없다는 의미다.
증권사 및 자산운용사 등 성장 단계에 자금이 대거 투입한다는 점도 투자 시점을 저울질하는 주된 이유로 꼽힌다. 금융투자업계에 대규모 자금 투입이 예상되는 내년 안팎으로 초기 유망 기업 발굴에 속도를 내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이날 금융투자업계 대표와 상견례 자리에서도 “모험자본 생태계의 최전선에 있는 금융투자업권에 대한 기대가 어느때 보다 크다”면서 “모험자본 활성화를 위해 종합금융투자사업자 지정을 심사 완료 순서대로 신속하게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류근일 기자 ryuryu@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