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반 국민에게 전자파는 '암을 유발한다' '뇌 손상을 초래한다' '정자를 감소시킨다' 등 자극적인 표현으로 각인돼 과학적 사실과 별개로 단순히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로 인해 전력선, 기지국 등 전자파를 발생시키는 인프라는 혐오 대상이 되며,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는 요인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이는 전자파 노출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과학적 불확실성과 지식적 공백에서 비롯된 결과다.
이처럼 과학적 불확실성에서 비롯된 전자파의 잠재적 건강 위험을 관리하기 위한 하나의 접근방식으로 '사전주의 원칙'의 적용이 각국 정부에서 논의돼 왔다. 사전주의 원칙은 위험에 대한 과학적 증거가 충분히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선제적으로 예방조치를 취하는 위험관리 방식이다.
이 원칙은 유럽을 중심으로 환경, 공중보건, 식품안전 분야 등에서 채택돼 왔으며, 조치 강도는 피해의 심각성과 과학적 불확실성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과학적 불확실성이 크고 잠재적으로 심각한 위험에 대해 더 많은 연구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선제적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는 상황에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론자들은 이 원칙을 단순히 '사변적(思辨的) 위험'에 대응하는 비과학적 원리로 보며, 이러한 접근이 과학적 근거보다 대중의 불안과 공포에 편승한 정치적 판단에 따른 대응이라고 비판한다. 또, 이들은 책임 있는 정부라면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자파의 장기적 노출처럼 건강 영향의 실제 존재 여부가 불확실한 경우에 사전주의 원칙이 하나의 정책 옵션이 될 수도 있다. 이를 통해 입증되지 않은 건강상의 잠재적 악영향에 대한 추가적 불확실성을 일정 부분 완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위험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전제와 예방적 조치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비용 편익 분석이 반드시 수반해야 한다. 또 이러한 노출 지침이 곧바로 '안전한 수준' 혹은 '위험한 수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명확히 설명돼야 한다.
현재 국제 전자파인체보호기준을 제정하는 ICNIRP와 IEEE는 다년간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각각 ICNIRP(2010, 2020) 및 IEEE C.95.1(2019)으로 기준을 개정했다. 개정된 기준은 일부 주파수 구간은 이전보다 완화되고 다른 구간은 강화됐다. 이는 최신 과학적 근거를 반영한 세밀한 조정 결과다. 대부분의 국가는 이 개정된 기준을 검토 중이나 개정 기준의 도입이나 사전주의 적용 여부에 대해서는 국민 수용성과 사회적 합의를 고려해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세계보건기구(WHO)는 무엇보다도 과학적 근거 없이 사전주의 정책에 따라 기존 국제기준보다 낮은 전자파 노출 기준을 채택할 경우 전 세계가 공감하는 과학기반의 국제기준의 신뢰성이 훼손된다고 경고한다. 실제로 일부 국가들이 대중적 압력에 반응하여 민감시설 환경 등에 한정해 낮은 사전주의적 기준을 도입했지만 기대와 달리 대중의 위험 인식이 줄지 않고 오히려 우려가 커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초연결 디지털 사회에서 전파 이용기술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전자파에 대한 우려 또한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일수록 과학적 근거와 사회적 수용성에 기반한 균형 잡힌 정책이 요구된다. 필자는 잠재적 위험과 관련한 피해 발생 여부가 불확실한 전자파의 경우 사전주의적 규제 강화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대신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위험관리일지라도 신중한 검토 과정을 거쳐 전자파 인체보호에 대한 과학적 불확실성을 최소화하고 국민이 신뢰하고 수용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정책을 실행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민, 정부, 전문가, 그리고 시민단체 등 이해당사자 간의 폭넓은 사회적 협의를 통해 합의점이 도출돼야 한다. 전자파 위험성 논의의 핵심은 '무조건적인 공포'나 '무조건적인 안심'이 아니라 국민 안전을 최우선에 두되 과학적 근거에 입각한 합리적 보호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균형 있는 전자파 인체보호 정책을 위해 사회 전체의 성숙한 협력이 필요하다.
최형도 ETRI 전파연구본부 연구전문위원 choihd@etr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