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밀지도 반출 심의 보류] 정부, 논란 더 키운 보류 결정…통상 마찰 우려 속 '기준 부재'](https://img.etnews.com/news/article/2025/11/11/news-g.v1.20251111.6588a0d64e754dee893dfb816369df12_P1.jpg)
정부가 구글의 고정밀지도(1대5000 국가기본도) 반출 신청을 즉각 불허하지 않고 '보류'로 결정한 배경엔 복합적인 계산이 깔려 있다. 형식은 '보완 요구'지만, 내용은 안보 원칙과 통상·외교 리스크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은 결과다.
국토교통부와 국토지리정보원은 11일 협의체를 열고 구글에 내년 2월 5일까지 보완 신청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구글이 9월 기자간담회에서 “정부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밝혔지만, 실제 신청서에는 보안시설 가림 처리와 좌표 표시 제한의 구체적 기술 방안이 빠졌다. 정부는 “대외 의사표명과 신청서 간 불일치로 정확한 심의가 어렵다”며 보완을 요구했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절차상 불허 대신 기회를 준 것을 두고 “특정 기업에 특혜처럼 비칠 수 있다”는 시선도 나온다. 정부는 이를 의식한 듯 '기술적 보완'이라는 절차적 명분을 강조했다.
가장 큰 쟁점은 이번에도 국내 서버 설치였다. 정부는 △데이터 국내 저장 △보안시설 가림(Blur) 처리 △좌표정보 비공개 등 세 가지 원칙을 일관되게 적용해왔다. 국가기본측량성과에는 군사시설, 전력망, 통신시설 등 핵심 인프라 정보가 포함돼 있다. 해외 서버에 저장될 경우 정보주권이 훼손되고 보안 통제권이 사라진다는 이유다.
구글은 보안·좌표 처리에는 협조 의사를 밝혔지만, 국내 서버 설치만큼은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가 이를 이유로 심의를 중단하면서도 '보완 기회'를 남겨둔 것은 사실상 외교적 시간벌기로 해석된다.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 이후 각국의 데이터 현지화 규제를 '비관세 장벽'으로 지목하며 시장 개방을 압박해온 점도 정부 판단에 부담으로 작용했다. 지도·클라우드 등 디지털 데이터 이전 완화가 한미 통상 협상의 주요 의제인 만큼, 즉각적인 불허는 외교 마찰로 번질 가능성이 있었다.
최근 한미 정상회담 합의 내용을 담은 관세·안보 공동 팩트시트 발표가 원자력추진잠수함(원잠) 문안 조율 문제로 미뤄진 것도 변수였다. 정부는 두 사안을 동시에 고려하며 신중한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예상치 못한 보류 결정에 업계 '당황'
업계에 따르면 이날 열린 '측량성과 국외 반출 협의체'에서 정부가 서류 보완을 요청하며 판단을 연기한 것은 미국과의 통상 마찰을 피하기 위한 조치로 알려졌다. 협의체에서는 구글 측의 서류를 보완받아 충분히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된 것으로 전해졌다.
업계에서는 이날 정부가 다시 한 번 축척 1대5000의 고정밀지도 국외 반출 결정을 미룬 것에 대해 당혹스럽다는 반응이다. 지난 5월 한 차례 결정을 유보한 이후, 8월에도 한 번 더 유보해 처리 기한을 60일 연장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최종 결정을 내릴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협의체가 결정 시한을 내년 2월 5일까지 추가 연기하면서, 정부가 1년 가까이 고정밀지도 국외 반출을 검토하는 상황까지 왔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두 번째로 결정을 미룰 때는 민원처리법을 근거로 제시했다”면서 “지금은 협의체가 제시한 근거가 '서류 미비'밖에 없는데 지도 반출 관련 규정에는 그런 조항이 없다”고 지적했다.
업계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결국 한미 통상 협상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 정부의 눈치를 과도하게 보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고정밀지도 국외 반출 판단에는 안보가 우선 고려돼야 하지만 한미 간 무역 협상이 치열한 가운데 정무적 판단이 작용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학계 한 관계자는 “어떻게 보면 구글을 달래려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구글 달래기는 결국 미국의 눈치를 본다는 것”이라면서 “구글에 여유 시간을 준다는 것은 한국에 데이터센터를 짓거나 그 나머지 조항에 대한 부분을 구글이 어떻게 할지에 대한 결정을 내리라는 역제안의 의미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학계 다른 관계자는 “현 분위기는 다른 사안과 엮이는 것 아니면 더 지켜보겠다는 것”이라면서 “정치적 부담감이 있는 상황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고정밀지도 반출 불확실성↑…'기준 부재' 논란
업계는 고정밀지도 국외 반출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한층 커졌다고 보고 있다. 11일 협의체 회의 전까지만 해도 정부가 고정밀지도 반출을 불허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됐지만 상황이 변모한 것이다. 특히 구글은 정부의 요청 사항인 △안보시설 가림 처리 △좌표 노출 금지 △국내 데이터센터 설립 중 데이터센터 설립에는 끝내 동의하지 않은 상황이다. 현 상황에서 판단을 미룬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이에 따라 업계에서는 내달 8일로 예정된 애플의 고정밀지도 반출 신청 판단도 미뤄질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도 나온다. 애플은 지난 6월 16일 축척 1대 5000의 고정밀지도 국외 반출을 신청했으나, 9월 한 차례 유보된 바 있다.
애플은 구글과 달리 국내에 '서버'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어 이 부분에도 관심이 쏠린다. 애플은 지난 6월 제출한 '지도 등 또는 측량용 사진의 국외 반출 허가 신청서'에서 “한국 지도정보는 국내 서버에 저장돼 있어 해외 개발 자원을 투입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하지만 애플이 주장하는 서버를 실제 '데이터센터'로 볼 수 있는지 여부가 불명확하다.
업계 관계자는 “애플이 언급한 서버가 물리적 데이터센터인지, 임대 혹은 임차 형태인지가 불분명하다”고 말했다.
정부의 불확실한 판단이 이어질 경우 구글을 포함한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한국의 고정밀지도 반출을 지속적으로 요청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미 관세 협상이 아직 타결되지 않은 가운데, 고정밀지도를 포함한 디지털 비관세 장벽이 팩트시트에 포함될 경우 반출 요청이 거세질 수 있다. 이에 따라 고정밀지도 반출에 대한 명확한 기준과 세부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변상근 기자 sgbyun@etnews.com, 박효주 기자 phj20@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