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반도체 인쇄회로기판(PCB) 업계에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 인공지능(AI) 확산으로 반도체 시장이 초호황에 진입했지만 금·구리 등 원자재 가격 급등에, 단가인상은 요원해 공장을 가동할 수록 수익이 악화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어서다.
PCB 단체인 KPCA가 최근 국내 주요 반도체 기업 업체를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한 결과, 상당수가 급등한 원자재 가격을 최종 제품에 반영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KPCA에 따르면 금·구리 구매 가격은 연초 대비 각각 50%, 30% 늘었다. 그러나 이를 납품 단가에 반영하지 못한 기업은 전체 응답 기업 9곳 중 절반을 넘었다.
KPCA는 “기업 다수가 판매 가격 인상이나 협의를 진행하지 못하고 있었다”면서 “오히려 납품 단가를 인하 요구를 받은 기업도 확인됐다”고 전했다.
A 기판 업체 임원은 “금·구리 가격 상승분을 주 공급 제품에 반영하지 못해 신규로 출시하는 제품의 가격을 높이는 방법으로 자구책을 마련하고 있다”고 답했다.
금·구리는 반도체 기판 필수 원자재다. 제조 원가의 30% 이상을 차지한다. 첨단 반도체용 기판일 수록 비중은 더 높다.
금·구리 가격은 기판 사업의 연속성을 결정 짓는 중요 요소다. 자재 가격이 오르면 비용이 증가, 수익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생산원가가 오르면 판매가격도 인상돼야 하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납품단가 인상이 쉽지 않아서다.
반도체 제조사 입장에서는 기판 가격이 오르면 가격 경쟁력이 약화될 수 있기 때문에 단가 인상을 최대한 방어하려는 게 현실이다.
B 기판 제조사 관계자는 “원재료 국제 시세가 상승할 수록 원가 비중은 높아지고 마진은 감소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고객사인 반도체 제조사가 가격 협상에 우위를 점하고 있어, 기판 업계에서는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요구사항을 들어줄 수 밖에 없다.
여기에 기판의 뼈대가 되는 동박적층판(CCL)과 접착 및 절연 역할을 담당하는 프리프레그(PPG) 등 비금속 자재 수급에도 비상이 걸려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 반도체 기판 제조사는 “CCL 주요 공급사인 미쓰비시가스화학(MGC) 주요 자재는 평소 4주 납기가 최근 20주까지 늘었다”면서 “기판 제조에 타격을 줄 뿐 아니라 지속적인 가격 인상도 우려된다”고 말했다.
기판 업계는 원자재 가격 상승이 납품 단가에 반영돼야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납품단가 연동제 실효성 확보가 시급하다는 주장이다.
납품단가 연동제는 가격 상승분을 납품 대금에 자동으로 반영하는 제도다. 그러나 산업 현장에서는 연동제 대상에서 빼거나 우회하는 방법으로 가격 협상이 이뤄지고 있다.
안영우 KPCA 사무총장은 “최근 반도체 호황으로 기판 공장 가동률이 100%에 도달하고 있지만 운영비도 확보하지 못하는 실정”이라며 “새해 적자 전환을 우려하는 기업이 많다”고 말했다.

권동준 기자 djkw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