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올림픽공원을 가득 메울 수 있는 양이다. 국내에서 한 해 동안 버려지는 전기차 배터리 분리막 1만 톤을 쌓으면 그렇다. 이 얇은 플라스틱 필름은 대부분 소각되거나 매립된다. 페트병처럼 녹여 다시 쓰는 것도 쉽지 않고 분해를 시도해도 경제성이 맞지 않는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 세계 어디에서도 이 소재를 재활용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주식회사 라잇루트(대표 신민정)는 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영역에 도전장을 던졌다. 재활용이 불가능하다고 인식되던 전기차 배터리 분리막을 원사와 원단으로 전환하는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것이다. 텍스닉(TEXNIC)이라는 이름의 이 소재 브랜드는 분리막 고유의 물성을 그대로 활용해 투습, 방수, 방풍, 경량 성능을 구현했다. 기존 섬유 산업의 공정과 관습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기능성 소재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기술 개발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2019년 하반기 연구를 시작했지만 예상과 달리 난관이 이어졌다. 배터리 분리막은 수만 개의 미세한 구멍이 뚫린 구조로 이 구멍을 통해 수증기는 통과시키고 물방울은 차단하는 특성을 가진다. 문제는 이 얇고 예민한 필름을 직물에 결합하는 공정이었다. 기존 섬유 산업의 기계와 공정으로는 접근 자체가 어려웠다.
라잇루트 연구팀은 기계 개조부터 시작했다. 당초 3개월로 예상했던 개발 기간은 1년 6개월로 늘어났지만 결국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분리막의 미세구조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직물에 안정적으로 결합하는 독자 기술이었다. 2021년 하반기 상업화에 성공한 텍스닉은 이 기술을 기반으로 국내 특허 2건을 확보했고 유럽과 미국에 특허를 출원했다.
2022년 1월,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전자제품 박람회 CES에서 텍스닉은 혁신상을 수상했다. 글로벌 무대에서 이 한국 기업의 기술력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라잇루트는 이 성과를 하나의 도착점으로 보지 않았다. 직물에 필름을 결합하는 방식만으로는 적용 범위에 한계가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더 근본적인 해법이 필요했다.
2025년, 라잇루트는 기능과 목적이 명확히 구분된 신규 원단 라인업을 구축했다. 얇은 원단 위에서도 선명한 엠보 효과를 구현한 엠블럭스(EMBLUX), 전기차 배터리 분리막을 원사로 재활용해 제작한 네오포스(NEOFORCE), 경사와 위사의 비율을 5대5로 재직해 균형 잡힌 물성과 내구성을 확보한 하이파이브(HIGHFIVE)다. 각 원단은 구조와 성능에 따라 뚜렷한 차별점을 갖는다. 특히 네오포스는 필름을 직물에 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실 자체를 만들어낸 것으로, 이 역시 세계 최초 기술에 해당한다.
원사 개발 성공은 적용 범위를 획기적으로 넓혔다. 의류를 넘어 가방과 신발, 인테리어 제품, 차량용 시트까지 활용 가능성이 확장됐다. 라잇루트는 각 원단의 용도와 성능을 명확히 구분해 산업 현장의 다양한 요구를 충족할 수 있는 제품 포트폴리오를 완성했다.
시장 반응은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2025년 덴마크 디자이너 브랜드 엘리엇 에밀(HELIOT EMIL)과 협업해 첫 한국 진출 캡슐 컬렉션을 선보였다. 이 컬렉션은 텍스닉 원단을 적용해 제작됐으며 서울 한남동에서 팝업 스토어 형태로 공개됐다. 기능성 소재가 디자이너 브랜드의 조형 언어와 결합한 사례로 텍스닉의 디자인 적용 가능성을 입증했다.
국내 브랜드 적용 사례도 빠르게 늘었다. 가방 브랜드 월스와일 무브먼트는 텍스닉 원단을 활용한 제품을 출시했다. 백팩과 사코슈백, 마켓백 등 다양한 제품군에 적용됐으며 일상과 아웃도어 환경을 모두 고려한 구성이다.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 준태 킴의 2026년 봄여름 시즌 컬렉션 자켓에도 텍스닉 원단이 적용된다.
라잇루트는 소재 공급에 그치지 않고 산업 생태계 확장에도 나섰다. 홍익대학교 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 졸업전시에 참가하는 학생들에게 원단을 지원하며 미래 세대가 텍스닉 소재를 각자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학생들은 텍스닉이 가진 질감과 구조적 특성을 바탕으로 각자의 결과물을 완성했다.
한국 섬유 산업 전반을 향한 메시지도 분명히 했다. 텍스닉은 오랜 시간 반복돼 온 섬유 산업의 관성과 기준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의 흐름을 제시하기 위해 전시 '뉴 웨이브(NEW WAVE)'를 기획했다. 이 전시는 제품을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소재와 기술이 만들어내는 변화 자체에 초점을 맞췄다. 섬유 산업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안하는 시도였다.

2026년을 앞두고 라잇루트는 두 가지 전략적 과제를 설정했다. 하나는 이미 전 과정 평가(LCA) 검증을 마친 분리막 '원단'에 이어 분리막 '원사'에 대한 전 과정 평가(LCA) 검증이다. 소재 개발 단계에 머무르지 않고 검증 가능한 데이터 기반으로 환경 영향을 확인하며 보다 진정성 있는 친환경 행보를 이어간다는 계획이다. 친환경이라는 주장에 그치지 않고 수치로 환경 기여도를 증명하겠다는 의미다.
또 하나는 본격적인 글로벌 시장 진출이다. 라잇루트는 2026년을 기점으로 일본과 미국 시장 공략에 나선다. 텍스닉은 기능성 원단과 원사를 중심으로 해외 파트너십과 적용 사례를 확대하며 기술과 소재 자체로 경쟁하는 글로벌 시장 진입을 추진할 예정이다. 현재 유수의 일본과 미국 브랜드와 협상을 이어가고 있다.
라잇루트의 기술력과 성장 가능성은 정부 차원에서도 인정받았다. 중소벤처기업부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혁신 기업을 집중 육성하는 초격차 스타트업 1000+ 프로젝트에 선정된 것이다. 세계 최초 기술 보유와 실제 산업 적용 사례를 동시에 갖춘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연간 1만 톤씩 쌓이는 쓰레기를 실로 뽑아내는 기술. 라잇루트는 이 기술을 통해 섬유 산업의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기존 공정과 관습에서 벗어나 기능성과 환경 가치를 동시에 담은 소재로 글로벌 시장을 두드리는 중이다. 2026년 일본과 미국 시장에서 텍스닉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 그리고 그 결과가 한국 섬유 산업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임민지 기자 minzi56@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