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경제 규모는 약 30조 달러, 성장률은 4%다. 반면 2조 달러 규모의 한국은 2%에도 미치지 못한다. 혁신 경제의 중심은 미국과 중국으로 이동했고, 유럽은 상대적으로 저물어 가고 있다.미국 혁신 경제를 이끄는 곳은 실리콘밸리다. 왜일까?실리콘밸리는 단순한 기술 기업 집적지가 아니다. 전 세계 인재를 흡수해 혁신으로 전환하는 '글로벌 인적 자본의 용광로'다. 실리콘밸리 이민자들의 성장 과정과 그 경제적 파급효과를 분석하고, 한국의 실리콘 밸리인 판교·분당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실리콘밸리의 성공을 분석한 대표적인 학술적 기초는 안나리 색세니언(AnnaLee Saxenian) 교수의 '두뇌 순환(Brain Circulation)' 이론이다. 과거에는 인재가 본국을 떠나 미국으로 가는 것을 '두뇌 유출'로 보았으나, 색세니언은 이들이 미국에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다시 본국과 기술·자본을 주고받으며 양측의 혁신을 동시에 이끄는 선순환 구조를 증명했다.
미국 국립과학재단(NSF) 자료에 따르면, 미국 내 이공계(STEM) 박사 학위 소지자의 약 50% 이상이 외국 태생이다. 이들은 미국의 고등교육을 거쳐 실리콘밸리의 벤처 생태계로 흡수된다. 연구에 따르면 이민자의 창업 확률은 내국인보다 약 80% 높다. '이민' 자체가 위험을 감수하는 선택(Self-selection)이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실리콘밸리 기술 기업의 52%는 최소 한 명 이상의 이민자 창업자를 보유하고 있다. 미국 특허 출원 중 이민자 기여 비중은 약 30%다. 시가총액 10억 달러 이상의 미국 유니콘 기업 중 55%가 이민자에 의해 설립됐다(National Foundation for American Policy).
실리콘밸리 시스템은 외지인이 주류로 성장할 수 있는 사다리를 제공한다. 스탠퍼드와 UC버클리 같은 세계적 대학이 비자를 매개로 인재를 끌어들이고, 구글, 애플, 인텔 같은 빅테크에서 경험을 축적한다. 구글 엔지니어의 40% 이상이 외국인이다. 벤처캐피탈은 국적보다 아이디어와 실행력에 투자한다. 인도계, 중국계 투자 네트워크가 후배 이민자의 창업을 돕는다. 주류 사회 진입(Leadership)은 젠슨 황(엔비디아), 사티아 나델라(MS), 순다르 피차이(구글) 같은 이민 1세대 CEO는 강력한 상징이 된다.
그러나 현재 실리콘밸리는 이민 정책의 경직성으로 인해 도전에 직면해 있다. 비자의 병목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H-1B 비자의 추첨제와 영주권 대기 시간(인도인의 경우 수십 년)이 길어지면서, 인재들이 미국을 떠나 캐나다나 자국(인도, 베트남 등)으로 돌아가는 '역두뇌 유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 틈새는 한국의 기회다.
미국이 대학을 통해 인재를 선점하듯, 교육 체계를 개방해 외국인 인재를 선점해야 한다. 서울대·KAIST 등 주요 대학의 외국인 전형을 대폭 확대하고, 졸업과 동시에 취업과 영주권이 연계되는 '졸업-취무(취업+무비자) 패스트트랙'을 구축해야 한다.
또한 외국인 창업자에게도 자본이 동일하게 흘러가도록 하고, 외국인 창업 비자(D-8-4)의 조건을 대폭 완화하고, 정부 주도의 모태펀드에 '외국인 창업 지원 쿼터'를 둬 이들이 한국에서 유니콘을 만들 수 있는 토양을 닦아야 한다.
특정 지역을 인적 자본 특구로 지정해 그 구역 내에서는 영어 공용화, 외국인 전용 주거 단지, 국제학교 입학 자유화 등을 보장해야 한다. 실리콘밸리가 하나의 커뮤니티이듯, 외국인 인재들이 고립되지 않는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 핵심이다. 판교 분당은 물론이고, 대학교, 혁신도시, 기업도시에 과감히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실리콘밸리는 이민자를 '손님'이 아닌 '미국의 미래'로 본다. 한국 역시 우수한 동남아, 인도, 우크라이나 인재들을 우리 경제를 지탱할 '뉴 코리안(New Korean)'으로 받아들이는 사회적 캠페인이 병행돼야 한다.
미국 시스템이 비자와 물가 문제로 주춤하는 지금이 대한민국에는 역사적 기회다. 실리콘밸리가 이민자들의 에너지를 먹고 자랐듯, 우리도 전 세계 공학도들의 꿈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돼야 한다.대한민국이 제2의 한강의 기적을 쓰기 위해서는 우리만의 폐쇄적인 성벽을 쌓는 대신 전 세계 인재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광장을 만들어야 한다.
인재 유치는 실리콘밸리는 물론이고, 수백만 명의 인도 인재, 휴전 이후 우크라이나 이공대 인재, 동남아 인재를 한국으로 유치해 한국인과 함께 창업하고 일자리를 만들게 해야 한다. 이는 대한민국이 세계 경제의 최전선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정교한 투자 전략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외국인 인력 관리는 부처별로 파편화돼 있다. 비자는 법무부, 인력 유치는 산업부와 과기부, 유학생은 교육부가 각기 맡아 칸막이 행정의 폐해를 드러내고 있다. 관리가 아닌 유치와 예우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부처별 기능을 통합해 비자 발급부터 주거, 교육, 정착까지 원스톱으로 책임지는 강력한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 이는 인재를 심사하는 곳이 아니라 전 세계 인재를 향해 세일즈를 하는 국가 마케팅 본부가 돼야 한다
대한민국이 다시 도약하려면, 사람을 가려내는 나라가 아니라 사람을 끌어들이는 나라가 돼야 한다.전 세계 인재가 한국에서 배우고, 일하고, 창업하며 미래를 설계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 그것이 다음 성장의 출발점이다. 사람을 모으는 나라가, 미래를 만든다.
이광재 PD(전 국회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