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파칼럼] 전자파 갈등, 중립적 소통 기구로 풀어야

최형도 ETRI 전파연구본부 연구전문위원(한국전자파학회 감사)
최형도 ETRI 전파연구본부 연구전문위원(한국전자파학회 감사)

송전선로, 데이터센터, 5G 기지국 등 현대 사회의 필수 인프라인 이들 시설은 동시에 '전자파'라는 단어와 함께 사회적 갈등의 중심에 서 있다. 전력 수요와 정보통신 인프라는 빠르게 늘어나고 있지만, 전자파 인체 영향에 대한 불안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문제는 이 불안이 과학적 사실보다 불확실한 정보와 과장된 주장에 의해 증폭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핵심 인프라 구축이 지연되고, 사회적·경제적 비용은 고스란히 국민의 부담으로 돌아오고 있다

전자파 갈등의 본질은 위험 그 자체보다는 경제적 손실과 신뢰의 부재에 가깝다. 정부의 설명은 정책 홍보로 오해받고, 산업계의 해명은 이해관계자로서 의심받는다. 일부 시민단체가 제시하는 국제기준과 괴리된 낮은 기준을 제시하면서 오히려 불안을 키운다. 이러한 갈등 구조에서는 안전하다는 일방적 설명도, 위험하다는 막연한 주장도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외는 어떻게 풀고 있을까. 주요국은 이미 이 문제를 소통 구조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일본, 독일, 스웨덴, 호주 등은 정부 또는 공익기관을 중심으로 전자파 정보를 체계적으로 제공하고, 전문가 참여와 투명한 운영을 통해 국민 신뢰를 확보해 왔다. 이들 국가는 기존 법체계 안에서 제도적 근거를 마련하고, 독립성과 전문성을 핵심 가치로 삼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전문가 참여, 투명한 정보 공개, 시민과의 지속적 소통을 통해 중립성과 신뢰성을 확보해 왔다. 전자파 갈등은 전자파인체보호기준을 강화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과학적 사실을 '누가, 어떻게' 설명하느냐가 핵심이다.

물론 국내에서도 2000년부터 전자파인체보호기준을 제정해 시행하고,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한국전자파학회, 국립전파연구원,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에서 시민과의 소통 노력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왔다. 그러나 전자파에 대한 과학적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국민이 참여하는 소통 창구로는 자리 잡지 못했다. 2010년부터 전자파로 인한 갈등을 경감하기 위한 소통 기구의 필요성을 인식해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진파진흥기본계획에 반영하고, 전파법 개정을 추진해 법·제도적 기반을 만들고자 노력하였으나 번번이 개정이 무산됐다.

전자파 갈등은 '과학으로만' 해결되지 않는다. 과학은 출발점이지만, 해법은 신뢰와 소통에 있다. 이 해법으로 제시되는 것이 바로 '전자파 이해소통 중립기구'다. 이는 정부와 산업계로부터 독립된 제3의 주체로서, 전자파 관련 정보를 과학적 근거에 기반해 평가·제공하고, 갈등 발생 시 중재 역할을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주요 내용은 단순한 정보 제공을 넘어 국내외 연구 결과를 체계적으로 검토·정리하고, 국민 눈높이에 맞춘 설명 자료를 제공한다. 또 생활환경과 주요 설비에 대한 전자파 측정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한다. 더 나아가 전자파 관련 민원과 분쟁을 조정하고, 정책 결정 과정에 과학적 자문을 제공하는 기능까지 수행한다. 특히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전자파 모니터링이나 공개 설명회는 '보여주는 과학'을 통해 신뢰를 쌓는 핵심 수단이 될 수 있다.

현실적 측면에서 제도는 단계적으로, 신뢰는 장기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 새로운 단독 법률을 제정하기보다 전파법이나 에너지 관련 법에 근거를 두고, 정부 지원을 받는 비영리 전문기관이나 위탁기관 형태로 출범하는 단계적 모델이 제안된다. 또 전자파 이슈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통상부, 기후에너지환경부 등 여러 부처에 걸쳐 있는 만큼, 범부처 공동 지원 체계가 필요하다. 재원 역시 정부 출연금에만 의존하지 않고, 전력·통신 사업자와 지자체가 참여하는 중립적 펀드와 연구보조금 등 다원적 재원 구조를 통해 재정적 독립성과 지속 가능성을 확보해야 한다.

전자파는 보이지 않기에 불안이 커진다. 그리고 불안은 신뢰가 없을 때 갈등으로 변한다. 전자파 이해소통 중립기구는 이 단절된 신뢰의 고리를 잇는 장치다. 과학을 앞세운 소통, 투명한 정보 공개, 공정한 중재가 작동한다면 전자파 갈등은 '피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관리 가능한 사회적 이슈'가 될 수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주장보다, 더 믿을 수 있는 설명이다. 전자파 갈등 해소의 출발점은 바로 그 설명을 담당할 중립적 플랫폼을 만드는데 있다.

최형도 ETRI 전파연구본부 연구전문위원·한국전자파학회 감사 choihd@etr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