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 〈182〉지구촌 첨단 과학기술 축제 '대전엑스포93' 개막

김영삼 대통령이 1993년 8월 6일 대전엑스포에서 태양열 자동차를 시승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영삼 대통령이 1993년 8월 6일 대전엑스포에서 태양열 자동차를 시승하고 있다. 〈연합뉴스〉
1993년 대전엑스포 93일간 대장정…기념비 높이도 93m

“우와, 우와.”

함성과 환호가 도룡벌을 흔들었다.

1993년 8월 6일. '새로운 도약의 길'을 주제로 한 지구촌 과학기술 축제인 대전엑스포가 역사적인 막을 올렸다. 개발도상국에서 개최한 최초의 엑스포였다.

“대통령 내외분이 입장하십니다.”

이날 오전 10시 10분. 김영삼 대통령 내외가 대전시 유성구 도룡벌 박람회장 대공연장에 입장하자 참석자들이 기립박수를 보내며 환호했다.

개회식에는 김 대통령 내외를 비롯해 이만섭 국회의장, 김덕주 대법원장, 황인성 국무총리, 테드 앨런 국제박람회기구(BIE) 의장, 오명 대전엑스포 조직위원장, 정세영 현대그룹 회장, 최종현 선경그룹(현 SK그룹) 회장, 구자경 럭키금성그룹(현 LG그룹) 회장, 김준성 대우그룹 회장 등 재벌 총수들과 참가국 관계자 등 2500여명이 참석했다.

개회식은 식전 공연행사로 대전엑스포 상징물인 꿈돌이가 태양열 자동차를 타고 대전엑스포 상징 조형물인 한빛탑을 돌아 대공연장에 입장하면서 시작했다.

팡파르와 함께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태극기와 BIE기를 게양하고 도우미와 참가국 기수단이 참가국 국기와 국제기구기를 들고 입장했다.

오명 대전엑스포 조직위원장 개회사와 염홍철 대전시장 환영사, 테드 앨런 BIE 의장 축사, 김영삼 대통령 대전엑스포 개회선언 순으로 개회식은 1시간 40여분간 진행했다.

김 대통령은 개회 선언에서 “대전엑스포는 인류사회의 새로운 꿈과 희망을 제시하는 인류 전체의 축전”이라며 “우리 민족의 새로운 출발점이자 세계 인류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김 대통령은 “대전엑스포에서 만납시다. 다시 출발합시다. 새롭게 도약합시다”라며 “저는 이제 희망과 도약의 대전엑스포 개막을 선언합니다”라고 말했다.

김 대통령이 개회를 선언하자 대공연장 천장에서 빨강. 노랑 등 오색 꽃가루가 쏟아졌고 참석자들은 열띤 박수로 호응했다.

오 위원장은 개회사에서 “대전엑스포라는 용광로를 통해 우리는 인류의 창조적 역량이 무한함을 다시 한번 확인할 것”이라며 “지구촌은 한가족이라는 인식과 공존공영을 염원하는 인류의 소망을 더욱 굳게 다지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식후 공연인 뒷마당 행사에는 학생과 군장병 등 1000여명으로 구성한 초대형 사물놀이패가 피날레를 장식하고, 대전엑스포 개막을 세계 어린이에게 알리는 꿈돌이 편지를 담은 대형기구가 하늘로 높이 날아올랐다.

대전엑스포 주제가인 '그날은' 88서울올림픽 주제곡인 '손에 손잡고'를 부른 코리아나가 불렀다.

당시 여당인 민자당은 “인류 과학과 문화를 발전시켜 21세기를 주도할 한민족을 저력을 보여 줄 것”이라고 말했다. 야당인 민주당도 “온 국민이 단합하고 과학과 기술만이 무서운 국제 경쟁에서 이기는 길이라는 신념을 심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엑스포 일반 관람은 1993년 8월 7일부터 시작했다. 이날 오전 9시 20분 박람회장 종각에서 엑스포 대종을 5번 타종하면서 개막식을 갖고 11월 7일까지 93일간의 대장정에 돌입했다.

오명 대전엑스포 조직위원장(현 국가원로회의 상임의장)의 회고.

“조직위원장은 내 인생에서 가장 괴롭고, 가장 보람 있고 가장 영광스러운 길의 시작이었다. 엑스포는 88올림픽의 성공으로 국제 무대에 화려한 신고식을 치른 우리가 경제적으로 크게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절대로 놓칠 수 없었다.”(30년 후의 코리아를 꿈꿔라)

오 위원장은 “대전엑스포는 우리나라에서 새롭게 시도한 첨단 과학기술의 종합 전시장이었고 우리나라 전통문화를 비롯해 지구촌 곳곳의 다양한 문화예술, 그리고 과학기술과 만난 미래지향적인 문화예술을 선보인 잔치마당이었다”고 말했다.

엑스포는 개막 첫날부터 관람객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첫날 10여만명이 입장했다.

'도우미'라는 명칭도 엑스포에서 처음 사용했다. 공모를 통해 선정한 명칭이었다.

1992년 5월 조직위는 시범도우미를 모집했다. 인기가 폭발적이었다. 11명 모집에 1600여명이 몰려 130대 1 경쟁률을 기록했다. 1993년 3월 770명의 본도우미를 선발할 때는 2만2000여명의 지원자가 몰렸다. 그만큼 대전엑스포에 대한 국민 관심도는 높았다.

대통령 가족도 엑스포에서 일했다. 대전 엑스포 준비가 한창이던 어느 날, 청와대 모 수석이 오명 위원장을 찾아와 부탁했다.

“대통령 가족 중 한 사람이 엑스포에서 일하고 싶어합니다. 적절한 곳에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며칠 후 상당한 미모에 지적인 젊은 여성이 오명 위원장을 찾아왔다. 알고 보니 노태우 대통령의 딸인 노소영 씨(현 아트센터 나비관장)였다.

“개인 자격으로 일하시겠습니까?”

“예, 개인 자격으로 엑스포에서 일하겠습니다. 그래서 이력서를 써 왔습니다.”

오 위원장은 이력서를 받아 조직위 총무부에 넘겼고 조직위는 그를 미래예술팀장으로 발령했다. 그는 대전엑스포에서 2년 이상 팀장으로 근무했다.

오명 위원장의 회고.

“엑스포 기간 노소영 팀장은 많은 고생을 했다. 대통령 가족이자 대그룹(현 SK그룹) 맏며느리였지만 그는 엑스포 기억 속에 일 잘하는 미래예술팀장으로 남아 있다.”(30년 후의 코리아를 꿈꿔라)

조직위는 주제와 부제를 구현하기 위해 개발도상국과 선진국이 보유한 전통기술과 과학기술을 잘 조화시켜 '주제의 마당' '과학기술 교류의 마당' '세계인의 한마당' '문화예술의 마당' 등을 마련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미래 과학기술 전시관은 '정부관'이었다. 정부관에는 세계 최초로 조각하는 로봇과 그림 그리는 로봇이 등장해 한국 과학기술의 위상을 세계에 자랑했다.

액스포 한빛탑은 21세기를 향해 도약하는 과학한국의 미래를 상징하고 개발도상국에서는 처음 개최한 '대전엑스포93'을 상징하는 기념비였다. 높이도 93m로 했다.

전국 14개 시도가 14개 시도관을 운영했고 국제관, 재생 조형관, 전기에너지관, 중견기업들이 참여한 도약관, 중소기업 공동관인 번영관, 지구관, 과학관, 정보통신관, 우주탐험관, 자동차관 등을 선보였다.

이중 재생조형관에는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인 백남준 선생이 작품 거북선 등을 전시했다.

항공우주연구소(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서 과학로켓 실물 모형과 과학위성 우리별 2호도 실물 모형을 우주탐사관에 전시했다.

한국전기연구소(현 한국전기연구원)와 국내 관련 업체가 협력해 개발한 전기자동차와 해상기술연구(현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주관으로 개발한 태양전기자동차를 지동차관에 내놓았다.

엑스포는 자동차관 주위에 간이 주행로를 마련해 무인 자동차를 운행했다. 우주 아기를 형상화한 인공지능 꿈돌이 로봇과 꿈순이 로봇이 어린이 관람객을 맞이했다. 이 로봇은 첨단센서와 컴퓨터로 이동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획기적인 최첨단 기술이었다.

1993년 11월 7일. 대전엑스포는 93일간의 대행진을 마치고 막을 내렸다.

이날 오후 5시 30분 황인성 국무총리와 테드 앨런 BIE 의장, 오명 엑스포 조직위원장 등 2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공연장에서 폐회식을 가졌다.

대전엑스포는 세계 108개 국가와 33개 국제기구가 참여한 사상 최대 규모였다. 외국인 관람객 70만명을 포함, 1400만5808명이 다녀가는 대성황을 기록했다. 엑스포 기간에 90여국에서 1800여명의 바이어가 다녀갔고 수출 1190건, 합작과 기술이전 124건의 실적을 올렸다. 3조원 이상 생산 증가 효과와 20만명 이상 고용 증가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오 위원장은 폐회사에서 “우리 국민이 그동안 축적한 역량과 예지로 함께 창조해낸 축제의 한마당이었으며 새로운 도약을 위한 재충전의 장이었다”고 말했다.

지구촌 과학기술 축전인 대전엑스포는 숱한 감동과 환희 속에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