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는 이미 '숨겨진 화폐'가 존재한다. 신용카드를 쓰면 포인트가 쌓이고, 비행기를 타면 마일리지가 적립되며, 통신사와 유통사는 멤버십 혜택을 제공한다. 확인 가능한 수치만 보더라도 카드사 연간 포인트 적립액은 약 6조원(금융감독원, 2025), 대한항공·아시아나 합산 마일리지 이연수익은 약 3조 6000억원(각 사 반기보고서, 2025)에 달한다. 통신·유통·간편결제 포인트까지 포함하면 전체 포인트 경제 규모는 수십조원대로 추산된다. 2024년 명목 GDP 2549조원과 비교해도 결코 작지 않은 규모다.
문제는 이 돈이 '돌지 않는다'는 점이다. 카드사 포인트는 2021~2024년 4년간 총 3160억원, 연평균 약 800억원이 소멸됐다(금융감독원, 2025). 유통 분야 포인트도 연간 약 132억원이 사라진다(한국소비자원·공정거래위원회, 2024). 확인된 수치만으로도 매년 약 1000억원이 국민의 손을 떠나 기업의 이익으로 전환되고 있다. 한국소비자원 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 50개 포인트 중 62%가 상법상 소멸시효(5년)보다 짧은 1~3년의 유효기간을 설정했고, 92%는 소멸 전 사전고지 절차가 미흡했다. 소비자가 인지하기도 전에 포인트가 사라지는 구조적 결함이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가.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포인트는 기업 생태계 안에 갇혀 있다. 항공 마일리지는 항공사 중심으로만, 유통 포인트는 해당 그룹 안에서만 쓰인다. 이는 기업 입장에선 고객을 묶어두는 전략이지만, 경제 전체로 보면 유동성을 차단하는 장벽이다.
둘째, 회계 구조가 소멸을 장려한다. 포인트는 발행 시 계약부채로 잡히지만, 소멸되는 순간 매출로 전환된다. 기업 입장에서 포인트 소멸은 곧 이익이다. 소비 촉진이 아니라 '소멸 유도'가 합리적 선택이 되는 왜곡된 인센티브 구조다.
셋째, 교환 인프라가 없다. 포인트 간 교환에는 기업 간 계약과 IT 연동이 필요하고, 소상공인은 사실상 참여가 불가능하다. 결과적으로 포인트는 '섬'처럼 고립된다.
이 구조를 바꾸면 소비는 움직인다. 행동경제학의 '하우스머니 효과(House Money Effect)'는 보너스나 예상치 못한 수입이 일반 소득보다 더 적극적으로 소비되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다(Thaler&Johnson, 1990). 포인트 사용이 추가 지출을 수반하는 경향은 카드사 데이터에서도 관찰된다. 나아가 포인트 사용처가 지역 식당, 전통시장, 소상공인으로 확대되면 지역화폐와 유사한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2020)은 지역화폐의 소비 승수효과를 2.69로 측정한 바 있다. 포인트는 별도의 재정 부담 없이 같은 방향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수단이다.
해법은 네 가지 축으로 구성된다.
첫째, 소멸 부담금 제도다. 소멸된 포인트의 일정 비율을 소비자보호기금으로 납부하게 하면 기업의 소멸 유도 인센티브가 사라진다. 휴면예금이 서민금융진흥원으로 이전돼 취약계층 지원에 활용되는 구조와 같은 철학이다. 실제로 서민금융진흥원은 2025년 한 해에만 3732억원의 휴면예금·보험금을 원권리자에게 돌려줬다.
둘째, 세제 인센티브다. 포인트 교환 시스템 구축과 제휴 확대에 법인세 공제를 적용하면 기업은 이를 비용이 아닌 투자로 인식하게 된다.
셋째, 공공 교환 플랫폼이다. 전국에 이미 구축된 제로페이 인프라와 마이데이터를 연계하면, 국민이 하나의 앱에서 모든 포인트를 조회하고 소멸 알림을 받으며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개인정보 문제는 전체 소비 데이터가 아닌 포인트 잔액과 소멸 예정일만 연동하는 방식으로 최소화할 수 있다.
넷째, 유효기간 법제화와 자동환급제다. 현재 자율 개선에 머물고 있는 유효기간을 상법상 소멸시효에 맞춰 최소 5년으로 법제화하고, 소멸 직전 포인트를 자동 현금화해 지급하는 자동환급제를 도입해야 한다. 금융권 휴면계좌 반환 제도와 같은 철학이다.
해외에서도 방향성은 확인된다.
영국 Nectar 프로그램은 500개 이상의 브랜드가 참여하는 연합 포인트 시스템으로, 소비자가 단일 앱에서 적립과 사용을 통합 관리하는 모델을 이미 구현했다.
호주는 소비자 데이터 권리(CDR)를 금융·에너지 분야에 도입해 소비자가 자신의 데이터를 직접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디지털 결제 인프라와 마이데이터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제도만 정비하면 가장 빠르게 구현할 수 있는 나라다.
포인트는 새로 만드는 돈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지만 막혀 있는 돈이다. 소멸 부담금으로 기업의 행동을 바꾸고, 세제 인센티브로 참여를 확대하며, 공공 플랫폼으로 구조를 연결하고, 자동환급으로 소비자 권리를 보호하면 된다. 기업은 고객 충성도를 얻고, 소비자는 실질 소득이 늘어나며, 국가는 재정 지출 없이 민간 소비 활성화를 이끌 수 있다. 이미 존재하는 포인트 경제를 깨우는 것, 그것이 답이다.

이광재 PD(전 국회사무총장)
PD(전 국회사무총장) 이광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