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기고] 500년 전 온실 지혜로 세계 농업 '표준'을 짓다

이승돈 농촌진흥청장
이승돈 농촌진흥청장

1453년 겨울, 세종대왕 시대 의관(醫官) 전순의는 특별한 기록 하나를 남겼다. 농서(農書) '산가요록(山家要錄)'에 아궁이 불길이 바닥을 달구고, 솥에서 피어오른 수증기가 창호지를 두른 온실 안을 가득 채우는 장면이 상세히 담겨 있다. 차가운 삭풍이 몰아치는 한겨울에도 초록빛 채소를 길러낼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온돌 원리를 영농에 접목한 독창적 구조물, '토우(土宇)'였다.

복사열로 공간 전체를 고르게 덥히고 수증기로 습도까지 다스린 이 온실 건축법은 공기만 데우는 데 그쳤던 유럽식 난방과는 차원이 달랐다. 세계 최초로 알려진 17세기 독일 하이델베르크 온실보다 179년이나 앞선 기록이자 인류 농업사의 빛나는 자산이다. 그리고 570여년이 흐른 지금, 그 지혜가 다시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고 있다.

지난 3월 중순 독일 쾰른 GS1 센터. 제5차

'데이터 기반 농식품시스템 기술위원회(ISO/TC 347)' 총회 폐막 무렵 회의장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투표 결과 발표만을 기다리던 대한민국 대표단 12명의 가슴에 날아든 반가운 한마디 “의장국--대한민국.”

농촌진흥청과 한국농업기술진흥원, 충남대학교, 한국전자통신연구원, 민간기업들로 꾸려진 대한민국 대표단이 세계에서 모인 20개국 120명의 전문가 앞에서 일군 쾌거였다. '온실·환경제어 및 도시농업' 분야의 정식 작업반(WG2) 신설이 확정되고 대한민국이 의장국으로 선임된 것이다.

쉽게 말해 앞으로 전 세계 스마트농업이 어떤 방식으로 데이터를 만들고 공유하고 활용할 것인지를 정하는 '기준'을 한국이 주도하게 된 것이다. 이 표준은 단순한 기술 규격이 아니다. 스마트팜에서 수집되는 온도, 습도, 생육 데이터가 서로 다른 나라에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만드는 '공통 언어'에 가깝다. 이 기준을 누가 만드느냐에 따라 산업의 방향이 달라진다. 그래서 미국, 유럽, 중국 등 주요 국가들이 치열하게 경쟁해 왔고 이번에 우리나라가 그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그 파급력은 광범위하다. 우리 기준이 국제 표준이 되면 국내 스마트농업 기업들은 해외 시장 진출 과정에서 겪는 기술적 장벽이 줄어 별도의 기술 수정 없이 세계 시장에 진입함으로써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수출 장벽은 낮아지고 기술 신뢰도는 높아지며 시장 확장 속도는 빨라진다. 또 데이터 기반의 정밀 농업은 물과 에너지 사용을 줄이면서 생산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결국 표준을 선점하는 것은 산업 경쟁력뿐 아니라 지속 가능한 농업을 만드는 기반이 된다.

농촌진흥청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기상정보·위성데이터·스마트 곤충 등 새로운 분야로 표준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또 현재 작업반(WG)을 보다 전문적인 분과위원회(SC) 수준으로 발전시키고 차기 농식품시스템 기술위원회도 국내로 유치해 대한민국이 글로벌 스마트농업 논의의 중심에 서기 위한 기반을 한층 강화해 나가겠다.

500년 전 선조들은 온돌을 활용해 계절을 넘어서는 농업을 구현했다. 오늘 우리는 데이터를 통해 국경을 넘어서는 농업을 만들어가고 있다. 결국 본질은 같다. 환경을 이해하고 기술로 극복하며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것. 농촌진흥청은 K농업 기술이 세계 스마트농업의 기준이 되고 우리 농산업이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 길을 묵묵히 열어가겠다.

이승돈 농촌진흥청장 citrus@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