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산책]포스트모더니즘과 창조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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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환규 부산대 컴퓨터공학과 교수
<조환규 부산대 컴퓨터공학과 교수>

전자신문에서도 매주, 때로는 거의 매일 창조경제에 관한 글을 만난다. 이것은 지금 경제상황을 반전시킬 요체는 창조경제의 성공적 안착밖에 없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공학도인 나에게 경제는 항상 어려운 주제지만 관련 글을 읽다 보니 1990년대 초에 유행한 포스트모더니즘 소동이 떠오른다.

당시 기존 문화의 해체를 목표로 삼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위세는 대단해 개그소재로도 활용될 정도였다. 혼성모방이라는 소설 작법이 표절의 일종인지 아니면 고차원적 시뮬레이션인지의 논쟁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점을 이뤘다. 도화지에 점만 찍어도 포스트모던 작품이 되는, 또는 춘향전과 심청전을 뒤섞은 황당한 이야기도 해체적 작품이라고 우기는 시절이었다. 이것도 포스트모더니즘, 저것도 포스트모더니즘. 자기류의 포스트모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기라도 하면 최신 사조에 둔감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풍토가 유행병처럼 떠돌았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약점은 일부 평론가들이 지적했듯 경계와 층위가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혼란을 잘 표현한 말이 있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닌 것은 과연 무엇이란 말이냐?”

포스트모더니스트의 답변은 더 걸작이었다.

“그런 질문이야말로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여하간 포스터모더니즘은 짧은 유행으로 끝났다. 항상 그렇듯 작품보다 해설이 더 설치면 시장은 일찍 파장을 맞게 된다.

혹자들은 창조경제가 모호하다고 비판하는데 그건 창조경제를 부적같이 남용하는 사람들로 인해 생긴 오해 때문이다. 부적을 걸어두면 복이 들어올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을 어쩌랴. 창조경제의 목표와 수단은 분명하다. 문제는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이 창조경제의 범위와 그 내부의 층위구조가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모두가 창조경제라는 식의 무한 영역확장은 식상해지기 쉽다. 창조경제인 것과 아닌 것과의 구분이 대중에게 설득돼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더 나은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차이를 보일 층위구조도 같이 준비돼야 한다. 그래야만 창조경제 안에서도 경쟁과 협력이 가능해진다.

사람들이 인식하는 또 다른 창조경제의 문제는 결과론적 해석이다. 어떤 성공사례를 거꾸로 올라가 그 안에 사실상의 창조경제 핵심이 있었다는 식의 결과론적 해석은 사람들의 자발적 참여를 방해한다. 창조경제는 결과에 상관없는 어떤 새로운 방법론, 알고리즘 중심이 돼야 한다.

특히 우려하는 것은 창조경제의 과도한 기술우위적 관점이다. 예를 들어 좋은 아이디어만 있으면 누구나 언제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은 다른 오해로 귀결된다. 그것은 시장에서 실패한 일의 원인을 낮은 기술이나 참신하지 못한 아이디어 탓으로 돌리는 것을 합리화해주기 때문이다.

기술의 역사가 보여주듯 기술의 우수성과 그것이 시장에서 성공하는 것과는 연관이 없다. 개인 창업자나 신규기업의 어려움은 기술 낙후성 때문이 아니라 기득권자들의 정치경제적 방해, 시장의 본원적 불확실성 때문이다. 그래서 시장을 기술적 우위만으로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 현실은 항상 괴물로 비쳐진다. 창조경제의 모형으로 회자되는 ‘강남스타일’에서 보듯이, 재미삼아 만든 B급 제품은 지구적 문화현상이 됐지만 최고의 기획전문가까지 동원한 후속작들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이것이 시장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든 뭐든 소비되는 것은 결국 감동이다. 기이함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매우 짧기 때문에 감동을 지속시킬 수 없는 사조는 결국 퇴출될 수밖에 없다. 창조경제도 그 핵심이 뭐든 안정적인 벌이수단을 대중에게 지속적으로 제공해 줄 때만 의미를 가진다. 그 지속성은 결국 교육 강화와 개선만으로 유지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축소된 과학교육이나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대입전형은 창조경제를 더욱 어둡게 하고 있다. 좋은 열매, 그것도 지속적으로 얻기 위해서는 뿌리가 튼튼해야 한다. 창조경제의 모든 역량을 교육개혁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환규 부산대 컴퓨터공학과 교수 hgcho@pusan.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