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17> 빨간 내복 사건

[박선경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17> 빨간 내복 사건

어린 시절 나는 외동딸이고 싶었다. 언니 옷을 물려 입거나 과자를 나눠 먹는 일 모두가 싫었다. 무엇보다 방을 혼자 쓸 수 없다는 것이 싫었다. 혼자 쓰는 방에서 누리는 고독은 포스터 속의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는 제임스 딘처럼 멋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내가 독방을 차지할 기회는 언니가 결혼한 후 단 1년뿐이었다.

형제자매가 많았다. 좋은 것보다 불편한 게 많은 유년이었다. 어느날 아버지가 사과 한 박스를 사 오셨다. 먹을 것을 사 오면 다섯 남매에게 골고루 배분해 주시는 건 부모님 몫이었다. 딸 넷에 아들 하나인 우리 집안의 규칙은 좋고 귀한 건 남동생이 차지하는 거였다. 그걸 불만으로 느낀 적은 없었다. 그날도 외아들인 남동생에게 가장 크고 예쁜 사과 세 개가 먼저 배당됐고, 나머지는 네 자매에게 돌아갔다. 나는 미리 눈대중으로 사과 개수를 세어 봤고, 남동생을 뺀 나머지가 자매들에게 할당되더라도 한 개가 남는다는 것을 알았다. 슬쩍했다. 아버지는 자매들에게 골고루 사과 두 개씩 배분해 주셨다.

그런데 내 셈과 달리 한 개가 모자랐다. 아버지는 화를 내셨다. 누가 가져갔느냐고 다그쳤지만 입을 다물었다. 나는 '모르는 일'이라며 시침을 떼고 일어섰다. 순간, 빨간 내복 바짓가랑이에서 사과 한 개가 주책없이 툭 떨어졌다. 가랑이가 찢어져 있는 걸 몰랐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일이다.

[박선경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17> 빨간 내복 사건

'빨간 내복 사건'은 명절마다 재탕하는 '추억의 명화'다. 그 아픈 추억은 도둑질, 거짓말, 욕심쟁이라는 불명예로 수십 년 동안 나를 규정한다. '웃자고 하는 얘기'로 내 기분을 농락하지만 싫지는 않다. 목격자들의 생생한 증언도, 범인의 구차한 변명도 지나간 추억이니까.

형제자매가 많은 가정을 다복하다고 한다. 모르는 소리다. 다복만 있는 건 아니다. 고통, 번민, 사고도 형제자매 수만큼 비례한다. 형제자매가 많은 집에 꼭 한두 명쯤은 사고뭉치가 있다. 말썽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부모님이 속 끓는 건 고사하고 형제자매까지 뒤치다꺼리에 동참하는 경우가 다반수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

고통과 번민 중심에는 '돈'이 있다. 있는 집은 있는 대로 없는 집은 없는 대로 돈 때문에 싸운다. 오죽하면 '무자식이 상팔자'란 속담이 나왔을까.

'무자식이 상팔자' 형태의 결혼 가정이 늘고 있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던 1970년대 가족계획 정책이 인구 감소로 나타났다. 정부가 아무리 출산을 장려해도 별 효과가 없다. 매년 출생아가 줄고 있다. 출산마저 확실히 '선택'인가 보다.

'어쩌다 미혼'보다 '작심하고 비혼'이 늘어 간다. 결혼하면 자녀는 꼭 낳아야 한다는 어른들의 출산 당위성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자녀를 하나 둘 출가시키면서도 '지들 새끼 지들이 알아서 낳든지 말든지' 언감생심 말도 못 꺼낸다.

한 자녀 가정의 부모는 하나 기르기도 벅찬 세상이라고 말한다. '무자식이 상팔자' 삶을 즐기는 부부는 주말이면 국내외 가리지 않고 여가를 즐긴다. 그들에게는 인생을 즐기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다. 아예 결혼 조건에 '아이 낳지 않을 것'이라고 못 박은 신혼부부도 꽤 있다.

아이가 태어나서 부모의 사랑 다음으로 배우는 것이 '형제애'다. 형제를 통해 질투, 시기, 원망, 양보, 배려, 나눔, 질서 등을 훈련받는다. 타인과 공존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가족 관계로부터 알게 된다. 가지 많은 나무에는 열매가 풍성하다.

문화칼럼니스트 sarahs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