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 <19>맏이 예찬

[박선경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 &lt;19&gt;맏이 예찬

어머니는 무엇이든 큰 언니와 상의했다. 아버지 생일 선물은 무엇이 좋을지, 김장은 언제 할 것인가부터 동생 소풍 갈 때 필요한 간식거리 리스트까지 의논했다. 처음엔 지시에 가까웠지만 시간이 갈수록 언니한테 일임하고 의견을 취합하는 일이 잦아졌다.

오남매의 첫째이자 맏딸인 언니는 살림 밑천이었다. 알뜰한 어머니를 닮아 돈이든 물건이든 허투루 낭비하는 법이 없었다. 적어도 부모님께 근심 걱정이 되는 자식은 아니었다. 언니는 부모님 신뢰를 한 몸에 받았다. 동생들은 언니를 통해 의사를 전달했다. 대화 창구뿐만 아니라 듣고 이해하고 수렴하고 조정하는 노련한 커뮤니케이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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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변한 건 대학에 들어가서부터였다. 대학에 들어가 남자 친구를 사귀고, 미팅도 하고,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점점 부모의 기대에서 멀어졌다. 귀가 시간이 늦어지면서 아버지한테 야단맞는 일이 잦았다. 부모님께 한 번도 대든 적 없는 그녀였지만 부당함을 따지고, 비합리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소통의 불협화음은 화목한 가정의 질서를 무너뜨렸다. 대학을 졸업할 때쯤 '눈에 흙이 들어가는 한이 있어도 허락할 수 없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 뒤 결혼을 감행했다. 그 후로 언니는 한동안 소식을 끊었다.

나는 인수인계 절차 없이 맏이를 대행했다. 동생들을 관리하며 조력자가 되는 건 물론 가정의 질서를 유지하는 교통신호 역할도 했다. 언니처럼 알뜰하지도 세심하지도, 속이 깊지도 않은 내게 맏이 역할은 부담 그 이상이었다. 부모님은 무엇이든 건성으로 듣는 나를 마땅치 않게 여겼다. 동생들의 반항이 심상치 않았다. “큰 언니 같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란 말을 수시로 꺼내며 언니와 비교했다. 인내하고 조율하는 게 어떤 역량인지 뒤늦게 깨달았다.

먼저 유학 간 큰 아이의 학교로 둘째를 보내면서 큰 애에게 신신당부했다. “네가 부모나 다름없으니 꼭 동생을 보살펴야 한다.” 큰 애 나이 열여섯이었다. 세 살 아래 동생은 열세 살 철부지였다. 둘째에게 유학은 부모와 떨어져 생활하는, 두려움이 아니라 간섭에서 해방되는 신나는 모험이었다. 둘째가 무탈하게 지낸 건 큰 애의 보살핌 덕분이었다. 동생 앞에서 한없이 엄격한 형이었지만 뒤로는 키다리 아저씨였다.

큰 애 고교 졸업식에서 선생님과 친구들은 세상에서 동생을 가장 아끼는 형이었다고 말했다. 혼자도 버거운 유학 생활에 동생의 짐까지 얹은 맏이의 스트레스를 생각하니 고마우면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영국 하트퍼드셔대 리처드 와이즈먼 교수가 1000명을 대상으로 유머 감각 설문 조사를 했다. 위로 형을 둔 사람 절반 이상이 유머 감각이 있는 반면에 맏이 가운데에는 3분의 1만 이런 능력을 보였다고 한다. 저런 의무와 책임을 어깨에 지고서 웃음이 나오겠는가.

큰 언니 부재 기간에 잠깐 맡아 본 맏이 역할에 나는 고독했고, 힘들었다. 부모 눈치를 봐야 했고, 동생을 챙겨야 했고, 자신의 성공을 위해 가족을 위한 '모범'을 요구받아야 한 자리였다. 맏언니처럼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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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이 역할은 어쩌면 남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원시시대, 가족이 형성되던 그 옛날부터 대물림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논밭에서 부모 일을 돕던 '큰형' '큰언니'가 그리한 것처럼 참고 견디고, 그러면서 사회 역할을 강요받는 그런 불쌍한 존재였는지 모른다.

오늘은 유독 맏언니 생각이 간절하다.

문화칼럼니스트 sarahs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