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늦다

“솔직히 이제는 두렵습니다.” 최근 만난 대형 증권사 임원이 자신의 스마트폰에서 '뱅크샐러드'(뱅샐) 애플리케이션(앱)을 열어 보이며 건넨 말이다. 신사업 구상에 참고하기 위해 처음 내려 받았던 '뱅샐' 앱은 어느새 회사 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MTS)만큼이나 자주 열어 보는 앱이 됐다. 수십년을 금융권에 몸담으며 개설한 은행·증권 계좌와 대출·카드 내역 등을 한 번에 살피기에 이만 한 것은 없었다.

불과 1~2년 전까지만 해도 금융투자업계가 바라보는 핀테크 혁신이란 '찻잔 속 태풍'에 불과했다. 핀테크 기업의 신규 서비스에 금융권 관계자 대다수는 “돈을 버는 핀테크 기업이 있느냐”며 반문하기 일쑤였다. 규제 대표 산업인 금융 영역에서 신규 진입 기업이 제대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쉽지 않으리라는 시각이 팽배했다.

1년여 만에 상황은 완전히 뒤집혔다. 규제 샌드박스에 가장 많은 신청이 몰린 분야는 정보기술(IT)이나 신산업 분야가 아닌 금융 영역이었다. 그만큼 금융 혁신에 대한 목마름이 컸기 때문이다. 제도 개선 속도도 빠르다. 기존 규제에 대한 특례를 적용해 핀테크 기업에 신규 서비스 기회를 열어준 데 이어 오픈뱅킹을 도입해 은행권의 금융결제망을 모든 핀테크 기업과 은행이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방하기로 했다.

위기감을 느낀 은행과 카드사는 지정대리인, 서비스 위탁 등을 통해 핀테크 기업과의 협업 확대에 열을 올리고 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만큼 이제는 살기 위해서라도 움직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금융투자업계는 여전히 평온하다. 금융투자업 특성 상 본업에 대한 위탁, 지정대리인 허용 등 여타 금융권에 적용되는 규제 완화가 조금 더디게 적용됐기 떄문이다. 금융투자업계에도 은행 및 카드업권과 마찬가지 기준을 적용하겠다는 금융 당국의 신호에도 아직까지 뚜렷한 혁신 행보는 눈에 띄지 않는다.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생태계는 도태하기 십상이다. 전 금융권의 변화 속에 홀로 변치 않으리라는 것은 착각이다. 금융투자업계는 '남의 돈으로 자신의 배를 불려 왔다'는 세간의 시선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금융권도 택시업계와 같은 상황에 직면할지 모른다. 눈앞에 위기가 닥친 후에는 이미 늦다.

유근일기자 ryuryu@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