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세한도(歲寒圖)

[데스크라인]세한도(歲寒圖)

우리나라 최고 명필로 통하는 추사 김정희 선생은 금수저 출신이다. 이 덕분에 어려서부터 부친을 따라 청나라를 오가면서 소동파, 옹방강 등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하며 학문을 닦아 금석학과 서예 부문의 대가로서 일가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노년에 제주도로 유배돼 오로지 책을 벗 삼아 버텨야 했다. 그런 그에게 제자 이상적은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올 때마다 귀한 서적을 구해다 줬다. 권력자에게 바치면 출세를 보장받을 수도 있는 귀한 책이었다.

깊은 감명을 받은 추사는 조그만 집 하나와 앙상한 고목, 집에 비스듬히 기댄 소나무 한 그루와 잣나무 몇 그루를 담은 세한도를 그려 이상적에게 선물했다. 논어에 나오는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라는 구절을 떠올리며 쓸쓸하고 썰렁한 자신의 처지와 이상적의 의리를 표현한 것이다. 논어구는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의미다. 그림에는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長毋相忘)는 인장도 찍었다. 청나라 학자들도 극찬한 '세한도'에 담긴 뒷이야기다.

국내 산업은 그동안 일본의 앞선 소재·부품·장비 산업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성장해 왔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제는 국내 산업 생태계에도 지각 변동이 불가피해졌다. 일본은 결국 우리나라를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 명단에서 제외했다.

그러나 위기는 늘 기회와 함께 온다. 이 같은 일본의 행보는 우리 정부와 산업계에 '탈일본' 화두를 던져 줬다. 정부는 소재부품 연구개발(R&R) 전담 컨트롤타워를 설치하고 기술 자립화가 시급한 부품·소재·장비 R&D에 내년부터 3년 동안 5조원을 투입한다는 내용의 '소재·부품·장비 연구개발 투자 전략 및 혁신대책'을 확정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산하 출연연구소와 함께 장기 대책 마련에 나섰고, 산업자원부는 이번 추가경정예산(추경)부터 국산화 R&D 과제를 반영한다. 중소벤처기업부도 중소기업 제조 혁신과 기술 역량 강화를 지원하기 위해 내년도 예산을 올해보다 31%나 올려 잡았다. 역대 최고 수준이다.

전국 지방자치단체도 피해 기업 대상으로 각각 수백억원 규모의 경영안정자금을 편성했다. 또 지방세를 감면해 주고, 개발비 지원 방안도 강구하고 있다. 대학과 연구소 등도 어디든 원하는 기업이 있으면 달려가 돕겠다며 기술자문역을 자임하고 나섰다.

특히 마치 오래 전부터 준비해 온 것 같은 관련 대기업의 자구 노력은 빠르고 강해서 믿음이 간다. 벌써부터 곳곳에서 '국산화 성공' 뉴스가 답지한다. 전국에 부는 이런 뜨거운 국산화 열기에 마음이 든든하다.

그러나 우리가 절대 간과해서는 안될 게 하나 있다. 생태계는 결국 강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약육강식 세계라는 사실이다. 기업 간에도 그렇고 나라 간에도 그렇다. 지금 우리가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에 뜨겁게 반응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해당 분야 산업 경쟁력이 일본에 뒤져 있었기 때문이다.

'장무상망(長毋相忘)' 해야 한다. 국운을 바꿀 수도 있는 이번 사태를 잠시 하다 상황이 종료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멈춰서는 안 된다. 오래도록 잊지 말고 꾸준히 지속해야만 하는 작업이다. 그렇게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많이 길러 내야 한다.

김순기기자 soonkki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