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윤정의 XYZ 코칭]<22>댓글리케이션의 예의

“내 눈 똑바로 보고 말해” 하고 요구해 놓고 “어디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난리야”라고 혼낸다.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아들어?” 하고 물어 놓고 “니가 뭘 알겠니”라고 단정한다. “대답 똑바로 해” 하고 호통을 치다가 “어디서 말대답이야?”라며 화를 낸다. 앞뒤가 맞지 않는 어른들의 모순된 꾸중을 일컫는 유머다. 이처럼 어른 꾸중을 풍자하고 희화화할 수 있을 정도로 위계서열 문화는 수평 문화를 향해 가고 있다.

아빠가 아들에게 쓰레기 분리 수거를 시키면 예전에는 “네”라고 했다면 요즘은 “왜 제가 해야 하는데요? 기준이 뭔가요? 이렇게 하면 안되는 것 아닌가요?”라고 반론을 편다. 이런 때 아빠가 무조건 “내가 시켰으면 잔말 말고 그냥 해”라고 하면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일방의 강요가 안 먹히는 시대다. 요즘은 윗사람도 무조건 명령하면 안 되고, 이유와 근거를 대서 설명해야 한다. 이에 따라 아빠는 심호흡을 하고 차분한 어조로 아들에게 말해야 한다. “엄마는 식사를 준비하고 누나는 청소를 했다. 나는 욕조를 닦았단다. 우리는 가족 구성원으로서 함께해야 할 공동의 일이 있다. 네가 가족을 위해 쓰레기 분리 수거를 맡아 주기를 바라는데 네 생각은 어떠니?”라고 해야 한다. 지금 이 이야기를 듣자 마자 “아이고, 아들이 아니라 상전이네. 어른 해 먹기도 어렵네, 어려워”라고 한탄한다면 당신은 이미 꼰대가 돼 가고 있다. 사소한 것도 이견이 있다면 의논하고 협의해야 하는 세상이다.

[지윤정의 XYZ 코칭]<22>댓글리케이션의 예의

이제는 누구나 '댓글리케이션'할 수 있는 세상이다. 60대 교수가 쓴 게시글에 초등학생이 댓글로 토를 달 수 있다. 댓글리케이션이란 '댓글'과 '커뮤니케이션'을 합성한 신조어로, 인터넷 댓글이 소통의 중요한 채널이 되면서 등장했다. 게시글보다 오히려 댓글을 통해 정보를 얻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타인의 댓글에 영향을 받아서 없던 의견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의견이 바뀌기도 한다. 하나의 댓글이 다음 댓글을 불러들일 수도 있고 예기치 않은 토론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즉시성이지만 기록이 남고, 객관화가 가능하다. 타인의 의견을 훑어 보고 여론의 향방이 결정되기도 한다. 그래서 방청객 댓글이 드라마 주인공 캐스팅을 결정하기도 하고 국민 댓글이 입법을 발의하게도 한다. 댓글을 받아들여야 하듯 반대 의견을 들어야 한다. 누구나 댓글을 달 수 있듯 누구나 질문과 의견을 달 수 있다. 왜 사사건건 토를 다냐고 귀찮아 할 일도 아니고, 어디다 말대답이냐고 흥분해도 안 된다.

[지윤정의 XYZ 코칭]<22>댓글리케이션의 예의

댓글이 읽히고 반대 의견이 존중 받으려면 이의 제기에도 매너가 있어야 한다. 비분강개해서 상대를 무조건 공격하거나 빈정거리는 행동은 내 얼굴에 침뱉기다. 맞춤법도 엉망인데 문맥도 맞지 않으면서 사실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닌 인신공격성 댓글은 스스로만 오물을 배설한 게 아니라 그 댓글을 읽는 모두에게 오물을 분사하는 것과 같다. 인터넷 댓글처럼 일상에서 반대 의견을 제시할 때도 마찬가지다. 반대 의견일수록 만반의 준비와 신중한 표현이 필요하다. 불평가와 비평가는 다르다. 소신이 있어야 하지만 그 전에 사려 깊은 숙고가 필요하다. 영리하게 용감해야 한다. 당장의 흥분보다 장기 목적을 위해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만 옳고 그 나머지는 싹 다 엎어야 한다는 획일화된 사고 방식은 또 다른 꼰대의 사고 방식과 다를 바 없다. 기존 가치를 무조건 버리는 것이 새로운 것이 아니다. 새로워야 새로운 것이다. 비판만큼 수렴이 필요하다. 포용력이 있는 새로움이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오만함과 다름없다.

세상의 모든 일에 옳고 그름을 하나로 규정할 수 없다. 이 편에서 보면 내가 옳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상대가 옳을 수도 있다. 길게 보면 옳은 것이 옳은 것 아니기도 하고 그른 것이 그른 것 아니기도 하다. 세상 이치는 “맞다” “틀리다”로 양자택일할 일이 아니라 현 상황에서 최선의 것을 모색하는 과정이다. 콩나물국을 끓이다가 맛을 봤는데 맛이 없다고 싱크대에 싹 다 붓지는 않는다. 무엇이 빠졌는지를 찾아서 마늘도 넣고 소금 간도 더 하고 조미료도 첨가한다. 계속 맛을 내고 풍미를 더하기 위해 빠진 것을 추가한다. 인생도 그렇다. 그 무엇도 내다 버릴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다. 틀리고 맞는 것은 없다. 다만 지금 이 상황에서 모두에게 좀 더 효과가 있는 것을 찾을 뿐이다. 고도화하고 정교화하는 과정이다.

[지윤정의 XYZ 코칭]<22>댓글리케이션의 예의

그러려면 상반되는 두 개의 가치를 다 품을 수 있어야 한다. 모두의 조화를 추구하면서도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것, 결과를 요구하면서도 관계를 배려하는 것, 질서를 강조하면서도 자율성을 인정하는 것, 자신하면서도 비판을 수용하는 것 등 둘 다 가능하다. 역설의 가치를 껴안아야 한다. 흑백논리로 양자택일할 일이 아니라 다양성을 포용하는 관용이 필요하다. 분명하고 뚜렷한 주장은 방어 또는 논쟁 성격이지 않다. 관대한 열림으로 솔직하게 자기를 표현한다. 모두에게 바람의 근원은 하나라는 배경에서 서로에게 효과 높은 방안을 나누는 것이다. 내가 닫혀 있으면 남의 말을 들을 수 없다. '이 사람은 마음 깊은 곳에서 어떤 느낌을 받고 있을까' '무엇이 이 사람에게 가장 중요할까' '이 사람이 이 상황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를 들어야 새로운 대안을 보완할 수 있다. 자신은 규정하고 제한하는 게 아니라 창출하고 확장하는 거다. 산 세월만큼 선택할 옵션이 더 작아지고 좁아지는 게 아니라 선택의 폭이 더 많아지고 넓어져야 한다. 이제 반대 의견을 내세우기보다 보충 의견을 내 보자. 이것이 댓글리케이션의 예의다.

[지윤정의 XYZ 코칭]<22>댓글리케이션의 예의

지윤정 윌토피아 대표이사 toptmr@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