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민 교수의 펀한 기술경영]<204>당신이 만들어 가라

그리스어엔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가 두 개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다. 크로노스는 그야말로 '시간'을 말한다. 시간은 일정하게 흐르고 측정할 수도 있다. 휴대형 태엽시계가 크로노미터로 불리는 것도 이런 이유다. 카이로스는 우리에게 없는 단어다. '시간'이라기보다 행위에 가깝다. 이 때문에 그리스 신화에서 카이로스는 '기회의 신'으로 불리기도 한다.

지금처럼 위기란 단어가 크게 보인 적도 없다. 이것은 종종 자신의 행위와 무관하게 다가온다. 원하거나 원치 않거나의 문제가 아니다.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어떤 것도 불확실하다.

[박재민 교수의 펀한 기술경영]<204>당신이 만들어 가라

이런 이유로 위기는 극단의 불확실성을 닮았다. 그리고 이것 앞에서 우리는 길을 잃는다. 상식은 자산과 역량이 있다면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말한다. 과연 이 정도로 충분한 조언일까.

매킨지 컨설팅사 휴 코트니의 조언은 다르다. 코트니에게 위기를 다루는 방법은 불확실한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레벨 1은 합리 판단이 가능한 정도다. 예를 들어 혁신성으로 꽤 알려진 저가 항공사가 내 노선에 취항하는 것이라면 레벨 1에 해당한다. 내 수익성에 불확실성이 늘고 위협이 될 수도 있지만 고객이 이 저가 항공에 어떻게 반응할지 분석하는 것으로 나름의 전략을 삼을 수 있다.

레벨 2라면 어느 정도일까. 신규 항공사 면허가 느는 경우라면 어떨까. 거기다 언제, 어디에, 몇 개나 허가할지 불분명하면 불확실성은 커진다. 당황할 필요는 없다. 시나리오가 여럿일 수는 있지만 나름의 전략을 준비해 둘 수 있다.

그러나 레벨 3이 되면 이런 방법은 소용없어진다. 코트니의 말처럼 유럽 가전기업이 갑자기 인도 시장에 뛰어든다고 생각해 보자. 시장조사를 한다고 해도 모든 대안은 각기 가정이 옳다는 한도에서만 작동한다. 분명한 시나리오는 존재할 수 없다. 레벨 3에서 시나리오란 A, B, C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A에서 Z를 지나쳐 무한대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레벨 4가 되면 아예 분석을 통해 전략을 찾아낼 가능성은 사라진다. 막연한 방향성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코트니는 그럴수록 상황보다 시장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당신이 만들어 가라”고 조언한다. 코트니의 이 조언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우리 몫이다. 그러나 위기 상황에선 누구든 시장을 바꾸는 '성형자'가 될 수 있다.

평온한 항공 시장을 상정해 보자. 이곳에서 늦깎이 저가 항공사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반 없다. 기껏 이런저런 서비스를 바꾸는 정도다. 그러나 흔들리는 시장이라면 사정은 다르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누군가의 조그만 움직임이 이 흔들리는 좌판을 더 크게 요동치게 할 수 있다. 자못 굳건해 보이던 기반도 무너질 수 있다.

공교롭게 며칠 전 한 국내 저가 항공사가 다른 저가 항공사를 인수했다. 인수 금액은 이 시장에 걸린 판돈에 비하면 푼돈이다. 그러나 한때 이 시장을 양분해 오던 거인의 지분이 22%와 15%대로 줄어든 이곳에서 12.6%를 차지했다면 이제 이곳은 제법 큰 판을 앞둔 셈이 된다.
동굴 안에서도 크로노스는 흐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카이로스는 내 선택이다. 손에 뭔가를 쥐고 동굴을 빠져나오는 것과 간신히 벗어나겠다는 마음가짐은 다를지 모른다. 당신은 어떤가.

[박재민 교수의 펀한 기술경영]<204>당신이 만들어 가라

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jpark@konk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