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이기는 대통령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전기를 다룬 드라마 '더 크라운'에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나온다. 선왕 조지 6세가 사망하자 조지 6세의 어머니이자 엘리자베스 2세의 할머니인 메리 왕대비는 어린 손녀 엘리자베스에게 편지를 보낸다. '반드시 왕이 이겨야 한다. 항상 이겨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왕이 모두를 다 이겨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메리 왕대비는 어린 손녀가 여왕으로 즉위하면 개인 엘리자베스와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항상 부딪칠 것이라고 봤다. 개인으로서의 엘리자베스보다 여왕으로서의 엘리자베스 2세가 우선이어야 한다고 충고한 것이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많은 권력자가 국가와 국민이 아니라 자신과 가족·측근의 영달만을 위하다가 몰락했다. 우리 역사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다행인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 편에 서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개인이나 가족, 측근 편에 서서 국민을 실망시킨 적이 없다. 조국 사태와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사건 등 논란은 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사리사욕만을 챙겼다는 비판을 하기에는 어렵다.

우려 부분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한 문 대통령의 견해다. 문 대통령은 올해 신년기자회견에서 조 전 장관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고 했다. 공개석상에서 조 전 장관을 옹호했다. 적폐 청산, 검찰 개혁이라는 명분이 있지만 온갖 구설로 자리에서 물러난 측근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시한 것이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윤석열 검찰총장을 직무 배제한 지 이틀이 지났다. 조 전 장관 시절부터 이어진 법무부와 검찰 갈등이 폭발했다. 문 대통령은 이 같은 사실을 보고받고 침묵하고 있다. 조 전 장관, 추 장관, 윤 총장 모두 문 대통령이 국민의 뜻에 따라 임명한 사람들이다.
핏줄로 이어진 영국 여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국민에 의해 선출된 우리 대통령은 '통치하되 군림하지 않는다'. 이 둘은 정반대 지점에 서 있다. 그러나 우리도 대통령이 이겨야 한다. 개인이 아닌 대통령이 이겨야 한다.

[기자수첩]이기는 대통령

안영국기자 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