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完全社會]과학상상화를 그리는 다양한 방법

[SF 完全社會]과학상상화를 그리는 다양한 방법

개봉 이전부터 '한국에서 최초로 시도하는 우주 SF 블록버스터'라고 소문이 자자했던 영화 '승리호'를 감상하는 동안 초등학생 시절 과학의 날 행사로 매번 열렸던 과학상상화 그리기 대회가 문득 떠올랐다. '과학기술이 발전한 미래의 풍경을 상상해 그려 보자'는 취지의 행사인만큼 당시에 또래들이 그려낸 과학상상화 단골 주제는 휘황찬란한 미래 도시나 사람을 돕는 로봇, 아니면 태극기를 달고 별 사이를 누비는 우주선 등이 대부분이었다.

한번은 조금 다른 걸 시도하고 싶어 집에 있던 낡은 과학책 '프뢰벨 사이언스 스쿨' 시리즈에 소개되었던 궤도 엘리베이터를 흉내내 그린 적이 있었는데 어떻게 이런 구조물이 안정적으로 서 있을 수 있겠느냐는 담임 선생님의 회의주의 앞에 그만 머릿속이 새하얘졌던 기억이 있다(당시에는 정지궤도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승리호를 보니 당시에 그렸던 과학상상화의 세계가 화면 속에서 살아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한민국 한복판에 건설된 궤도 엘리베이터, 우주공간에 떠 있는 낙원 같은 미래 도시, 사람처럼 움직이고 생각하는 로봇에 태극기가 옆면에 당당히 그려진 우주선까지.

'SF 영화는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이 많이 필요해 한국에서는 만들기가 어렵다'는 뻔한 훈수가 무색하게 승리호는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으로 어릴 적 상상했던 SF 세계를 멋지게 시각화하고 있었다. 비단 비용이나 기술력 문제를 떠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SF적 상상력 산물을 그럴듯하게 그려 보여주는 일이란 결코 간단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어려운 영역에 한 발짝 내딛었다는 점만으로도 승리호가 펼쳐 보인 영상은 유의미한 성취라 볼 수 있다.

하지만 SF 세계를 그려낸다는 일의 성취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승리호 같은 영화보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하는 작품들이 있다. 영화보다 제작비 굴레에서 훨씬 자유로운 만화 세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SF적 상상력을 시각화하려는 시도가 다양하고 풍부하게 이루어져 왔고, 특히나 순정만화 장르에서 쌓아올린 결실이 한국 SF의 역사에 남긴 족적은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될 만큼 뚜렷하다.

전혜진의 '순정만화에서 SF의 계보를 찾다'는 오래도록 시시한 연애물이라고 무시돼 온 한국 순정만화계에 얼마나 방대한 SF 작품 흐름이 존재해 왔는지를 짚는다. 강경옥의 '별빛속에'부터 천계영의 '좋아하면 울리는'에 이르기까지, 이 책에서 소개하는 순정만화 계보는 마땅히 한국에서 SF를 다양한 방법으로 시각화하려 노력해 온 역사의 중요한 한 갈래로 평가할 만 하다.

한편으로는 성취가 언제나 뚜렷한 갈래 위에서만 이루어지라는 법은 없어서 지면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만화를 그려 공개할 수 있게 된 최근에는 전통적인 계보의 곁가지라 할 만한 곳에서도 아주 흥미로운 SF 작품이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잡지 및 웹툰 지면에서 '달이 내린 산기슭'을 연재하며 이름을 알린 손장원이 최근 전자책으로 펴낸 단편집 '별마다 피어나리'가 좋은 사례다. 작가의 전공 분야인 지질학과 고생물학을 중심 소재로 삼았던 대표작에서는 눈치채기 힘들지만 손장원은 각종 기계장치 묘사에 특히 능숙한 작가로 이러한 강점을 살려 한국 전통 디자인을 그대로 기계화해 SF 세계에 옮겨놓은 일러스트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여럿 공개하기도 했다.

새로 엮은 단편집에서도 '슈크림'의 고전적인 거대 로봇, 모티브가 된 전래동화 속 요소를 그럴싸하게 변형한 '흥부와 놀부와 제비'의 연구소와 비행장치 디자인, '한 번 더 우주로'의 유머러스한 피자 모양 기지 등 다양한 기계 디자인은 어김없이 돋보인다. SF 세계를 시각화할 때 '발달한 과학기술의 산물을 보는 즐거움'은 빼놓기 힘든 즐거움이라는 점에서, '별마다 피어나리'는 따스하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SF만의 매력을 충분히 살리는 데에 성공한 작품이라 할 만하다.

손장원의 만화가 구체적 과학기술의 산물을 묘사하는 데 집중한다면 특정한 지면 없이 인터넷에서 개인 창작물을 공개하며 활동하는 또 다른 만화가인 '반-바지'의 작품은 SF 특유의 짜릿한 경이감 그 자체를 그림으로 옮기려는 도전을 계속해 왔다. 단편집 '슈뢰딩거의 고양희'로 한데 묶여 나온 이러한 시도들은 전부 길게는 몇 페이지에서 짧게는 한두 컷밖에 되지 않는 만화이지만, 제한된 분량 속에는 '퐁당퐁당'이나 '할아버지의 시계'처럼 고풍스럽고 근사한 하드 SF는 물론 '나와 나타샤와 따름정리'나 '국내 최초 논리비행사' 등 더욱 과감하고 추상적인 발상의 산물까지 다양한 경이가 빈틈없이 들어 있다.

이러한 SF 경이를 시각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매체 자체의 특성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점 또한 반-바지 작품 특징이다. 초음파로 의사소통하는 생명체를 그리기 위해 말풍선이 컷 테두리에서 튕겨나오도록 그린 '박쥐 가족', 컷 사이에서 일어나는 착시현상을 이야기의 일부분으로 삼은 '주환씨 이야기', 그리고 컷의 흐름에 따른 시간의 진행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노는 시간여행 만화 연작 등은 모두 만화라는 형식과 SF적 발상을 긴밀하게 접목시키려는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종이 매체가 아닌 인터넷에서만 가능한 트릭을 사용한 몇몇 작품이 책에 실리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우주선을 무슨 색으로 칠할까 하는 과학상상화 그리기 대회의 뻔한 고민을 훌쩍 뛰어넘어, 한국 SF 세계가 만화 지면과 영화 스크린 위에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하고 선명하게 그려지려 하고 있다. SF의 시각화라는 결코 쉽지 않은 과제에 대한 더욱 다양한 답안이 앞으로도 꾸준히 등장해, 때론 익숙하고 때론 참신한 방법으로 계속해서 우리 눈을 즐겁게 해 주길 기대해 본다.

이산화 소설가
이산화 소설가

이산화 소설가

GIST에서 화학을 전공하였고, 같은 곳의 대학원에서 물리화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온라인 연재 플랫폼 브릿G에서 '아마존 몰리'가 2017년 2분기 출판지원작에 선정되며 작가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이후 '증명된 사실'로 2018년 SF어워드 중단편소설 부문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사이버펑크 장편 '오류가 발생했습니다'와 다수의 단편을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