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반도체 위기를 기회로

[기고]반도체 위기를 기회로

반도체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다.

일본의 대 한국 반도체 소재 금수조치로 인한 논란이 한창일 때 “우리는 절대로 일본의 금수조치를 극복할 수 없고, 50년은 걸릴 것이다”라는 주장이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불화수소 수급 문제는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협력하고 정부가 지원해서 단기간에 상용화 테스트를 거친 결과 잘 극복할 수 있었다.

이후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선도 기술 개발을 위해 대규모 연구사업 지원이 되고 있다. 이들 사업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지를 평가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점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반도체 산업의 위기에 체계적으로 대응할 시스템을 잘 갖추고 있는 것일까.

자동차용 반도체 수급이 어렵다, 미국이 반도체 분야에 56조원을 투자한다, 유럽도 반도체 자급에 나섰다 등 어두운 뉴스가 쏟아지고 있다. 일본의 금수조치에 못지않은 충격이 반도체 산업에 가해지고 있는 셈이다. 이에 맞춰 다양한 대책도 제기되고 있다. 기업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반도체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 인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반도체학과를 개설해서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 중소 팹리스를 지원해야 한다 등과 같은 주장이다.

미국은 이와 같은 반도체 수급 위기에 빠르게 대응했다. 산업계와 학계는 'semiconductor research corporation' 중심으로 올해 1월부터 준비해 둔 향후 10년 연구계획과 대략적인 투자 방향을 제시했고, 정부는 그 대책을 즉각 받아들여 56조원 규모의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핵심 반도체 전략의 하나인 차세대 지능형반도체 사업에 1조원을 투자하는 계획 마련에 4년이 걸렸다. 평소에 체계적인 의사결정을 위한 시스템을 마련해 두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앞으로 3~4년 안에 이종집적패키징기술 등 새로운 기술들이 상용화되면 기존 반도체 제조 기술의 판도가 완전히 바뀌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전문가가 되려면 10년도 더 걸리는 학부생 정원을 늘려서 언제 어떻게 위기에 대응하겠다는 것일까. 반도체특별법을 만들어서 세금을 감면하면 갑자기 세계와 경쟁할 수 있는 기술력을 확보하기 위한 투자가 가능해질까. 그동안 중소 팹리스를 계속 지원해도 퀄컴, 엔비디아(NVDIA), 암(ARM)과 같은 초우량 팹리스 회사가 생기지 않았는데 다시 추가 지원을 한다고 문제가 해결될까. 차량용 반도체를 개발한다 해도 신뢰성 테스트에만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는데 갑자기 연구개발(R&D) 과제를 만든다고 차량용 반도체 수급 문제가 해결되는가. 잠시만 생각해도 항간에 떠도는 대책들의 효과가 무척 의심스러운데 문제만 닥치면 똑같은 형태의 대책이 반복해서 나온다.

반도체 산업의 혼란은 일시적 문제가 아니라 이미 오래전에 예견돼 온 상황이다. 미세화 일변도의 기술 경쟁이 한계에 이르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상황이며, 반도체 기술이 새로운 세대로 바뀌기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전조일 뿐이다. 여기에 대응하는 방법은 차분히 미래를 준비하는 길밖에 없다.

우리나라만큼 반도체 연구 기반 시설에 많은 투자를 하고 전문인력을 이미 양성해 놓은 나라도 많지 않다. 대규모 R&D 프로그램도 이미 시작했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위기를 틈타 개별적인 이해관계를 관철하려는 이기심을 내려놓고 분산된 연구 인프라를 통합해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전략을 수립하고, 이미 육성해 놓은 수많은 전문인력을 적재적소에 잘 활용할 방법을 찾는 것이다.

대만의 경우 Taiwan Semiconductor Research Initiative를 통해 연구소·대학·기업을 통합하고 협력하는 체계를 갖추고 나서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전 세계에서 가장 활성화됐다는 벨기에 반도체 연구소 IMEC와 비슷한 정도의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위기가 기회로 바뀌는 이유는 평상시에는 불가능한 대책을 실행에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우리 실정에 맞게 이미 투자된 시설과 인력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전략적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산·학·연·관이 협력한다면 즉각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기본 틀을 바로잡지 않은 상태에서는 전문인력 양성, K-반도체 벨트 등 대책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이병훈 포스텍 전자전기공학과 교수 bhlee1@postech.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