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K-반도체 전략' 성공 방정식

[기고]'K-반도체 전략' 성공 방정식

같은 쌀도 시장에서는 평범한 보통 쌀이지만 군수 물자로 사용되면 '군량미'라는 특수 명사가 된다. 군량미가 됨으로써 쌀은 단순한 물품을 넘어 안보 물자가 된다. 미국에서 수동식 전화교환기에 투입된 교환원들의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자동식 전화교환기를 고안했다. 여기에 사용된 진공관의 잦은 고장을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트랜지스터, 즉 반도체다. 이렇듯 민간의 수요에 따라 반도체가 발명됐지만 실제로 초기 수요처는 대부분 무기와 관련된 분야였다. 역사가 보여 주는 것은 반도체가 태생적으로 국가 안보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이다.

반도체 산업은 한국의 핵심 산업이다. 반도체 산업이 무너지면 국가 경제 안위가 위태로워진다. 지난 2019년 일본이 반도체 관련 품목 단 두 개만 수출 규제를 했음에도 우리 반도체 산업은 전체가 삐걱대는 위기를 맞았다.

지금 전 세계가 반도체 공급망 재편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국가 차원의 대결투를 벌이는 이유는 원활한 반도체 공급 없이는 경제는 물론 군사 안보까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 방미에서 상호 반도체 공급망의 중요성을 인식했고, 그렇기에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우리 정부와 행한 첫 정상회담의 주요 의제 가운데 하나로 한국의 대미 반도체 투자를 채택한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자국 내에서 반도체를 생산하고 싶은 것이다.

지난 5월 13일 정부는 'K-반도체 전략 보고대회'를 열고 반도체 강국 실현을 위한 전략을 발표했다. 이 전략에서 기업은 오는 2030년까지 510조원 이상을 투자해서 압도적인 초격차를 유지하고 'K-반도체 벨트'를 구축해서 세계 최대·최첨단의 반도체 공급망을 완성하며 세제·금융·인프라 등 전방위적 지원 패키지를 제공함과 아울러 10년 동안 반도체 인력을 총 3만6000명 양성함으로써 우리 반도체 산업이 미래에도 건실한 경제 먹거리, 안보 지킴이가 될 수 있도록 하자는 구상을 담고 있다.

이번 정책은 그간 업계가 건의해 왔던 내용들이 대부분 반영돼 있어 반도체 산업에 종사하는 일원으로서 실로 반갑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는 좀 더 고민해야 한다. 해외투자와 보완적인 국내 제조 기반을 위한 반도체전략추진 등을 포함해 국민이 바라는 것은 반도체 산업이 좀 더 발전하는 것 그 이상이다. 현재를 넘어 미래로 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것이다.

메모리 반도체와 더불어 시스템 반도체 강국으로의 도약, 세계 반도체 산업 질서 주도, 반도체와 수요 산업 연합을 통한 신산업 창출, 지능형 사회로의 전환을 통한 현실세계와 사이버세계 융합 등 우리가 열어야 지평은 넓고 크다.

그 지평을 열고 다다르기 위해서 지금까지 흘린 땀보다 몇 배의 땀을 더 흘려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력은 의지를 배신하지 않기에 굳은 의지와 이를 뒷받침하는 노력이 있다면 우리가 열 신지평이 그리 벅찬 것만은 아니다.

정부가 모처럼 어렵게 만들어 준 K-반도체 전략이 성공하려면 이를 끝까지 밀고 나가서 반드시 이루고야 말겠다는 의지와 노력, 이에 호응하는 기업들의 경영전략, 정치권의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기업은 약속한다, 발전을 위한 그 어떤 노력도 아끼지 않을 것임을. 더욱 성숙한 산업 생태계를 만들고 창의와 혁신이 오월의 함박꽃처럼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산업으로 발전하기 위해 나아갈 것이다. 정치권에서도 반도체 산업 공급망을 강화, 국가 경제 안보를 튼튼히 하기 위한 논의가 한창이다. 이것이 더욱더 기대되는 부분이다. 정치적 지능으로 고민한다면 이전에 미처 생각하지 못한 신세계가 열릴 수도 있다.

지금은 변화가 필요한 시기다. 성공으로 가는 변화, 지평을 넓히는 변화, 양질의 내용물로 꽉 찬 사회를 만드는 변화, 이런 것들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 시금석의 자리에 반도체가 있다. 변화가 제대로 일어나기 위해서는 법적 조치를 통한 지속성과 안정성 확보가 필요하다. 업계에서 '반도체 관련 특별법'을 요청하는 이유다. 다른 국가들도 반도체 문제를 법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들도 이 사안이 얼마나 중요한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공공의 바퀴와 민간의 바퀴가 함께 제대로 굴러갈 수 있도록 정치권의 마차가 움직여야 한다.

저 먼 훗날 반도체가 역사의 유물이 될지도 모른다. 어느 허름한 창고 구석에서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손으로 기워 만든 낡은 헝겊 인형처럼 남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국가의 최전선에서 바이든에게는 편자의 못으로, 시진핑에게는 십년마일검으로 상징되는 생존의 전마이자 무기다. 그리고 예로부터 전마와 무기는 국가가 관리해 왔다. 그럼 우리에게 반도체는 무엇인가? 미래의 거북선이다. 나노로 만드는 거북선이다.

이창한 한국반도체산업협회 부회장, changhan.lee@ksi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