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간 황무지나 다름없던 시스템반도체 산업을 일궈온 국내 팹리스 업계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들이 성장해온 밑거름이 되었던 고가폰의 성장세가 멈추고 저가폰이 휴대폰 시장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올해 유럽 휴대폰 시장이 19%의 고성장세를 이어가고 있지만 고가폰은 3% 정도로 정체를 보이기 시작했다. 중국과 같은 신흥시장에서는 더하다. 저가폰 성장률이 30%에 달하고 있다. 노키아는 물론 프리미엄 휴대폰 전략을 고수하던 삼성전자·LG전자 등도 60달러 미만의 저가폰 생산을 늘리겠다고 선언했다. 베이스벤드 칩업체인 퀄컴까지도 내년부터는 고급형 칩보다는 저가 보급형 칩의 판매에 집중하겠다는 전략이다.
(상)위기인가 기회인가
국내 주요 팹리스 업체들은 DMB나 멀티미디어와 같은 고급형 기능을 특화하기 위한 반도체를 주요 아이템으로 하고 있으며, 이 전략이 지금까지 팹리스 성장의 발판으로 작용했다. 코아로직은 카메라기능을 특화시켜 2000년부터 3년 동안 5000%의 경이로운 성장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다른 분야에서 사업을 시작한 신생 팹리스 업체들도 고속 성장을 위해 속속 휴대폰 같은 대규모 시장 진출을 선언할 만큼, 고급형 휴대폰 시장은 국내 팹리스 업체들에게 최고의 시장으로 자리잡아 왔다.
IT SoC 협회의 자료에 따르면, 국내 팹리스 업체의 43% 가량이 카메라와 MP3 음악과 같은 휴대폰용 멀티미디어를 위한 반도체를 개발하고 있다. 차세대 무선통신 부문도 17% 가량이 된다. 결국 팹리스 업체들은 휴대폰 시장의 판도 변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고가 휴대폰 시장의 급작스런 정체는 고도성장을 거듭해온 국내 팹리스 업체들에게 심각한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은 고속성장을 달성하다 올해 뼈아픈 성장 정체를 맛보았던 몇몇 업체들에게 그대로 드러난다. 휴대폰용 메모리를 개발하고 휴대폰 1위 업체인 노키아에 제품을 공급하면서 단숨에 매출 1000억원대의 회사로 성장했던 이엠엘에스아이의 경우 올 하반기 30억원의 적자를 냈다. 매출도 3분의1 이상이 줄었다. 저가폰 시장 확대에 대한 대응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노키아·모토로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가폰에 주력해왔던 삼성전자와 LG전자도 저가폰 비중을 늘리겠다는 방침이다. 저가폰 시장에서의 승패가 그만큼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삼성과 LG를 주 고객으로 하는 팹리스 업체들도 이엠엘에스아이와 같은 위기가 닥쳐오고 있다는 신호다.
LG경제연구원의 한승진 책임연구원은 “고가폰용 시스템반도체에 매달려온 팹리스업체들도 이제 전략 수정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그는 “저가폰용 제품 개발을 위해서는 디자인에서부터 생산·판매에 이르기까지 비용절감을 위한 혁신이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앞서서 뼈아픈 경험을 한 이엠엘에스아이 유병덕 이사는 오히려 이 위기를 글로벌 플레이어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저가폰에 적합한 컷다운(저가형) 제품 개발과 비용절감, 경영 혁신을 통해 거래선을 전세계로 다변화하고 대규모 물량을 공급하는 규모의 경제를 이룰 수 있습니다.”
문보경기자@전자신문, okm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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