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법무부의 국제 카르텔 조사가 세계 최강으로 부상한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목을 옥죄고 있다. 지난 2005년 삼성전자(메모리반도체)에 3억달러, 지난해에는 LG디스플레이(LCD패널)에 4억달러의 과징금 폭탄을 내린 데 이어, 올해 들어 브라운관(CRT) 업계의 가격담합 조사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상황에 따라 PDP 모듈 업계까지 조사가 확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올해 수출 키를 쥔 우리 전자산업에 뇌관으로 도사리고 있다.
15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 법무부는 최근 대만 CRT 업체인 ‘중화브라운관’의 린전위안 전 사장을 가격 담합 혐의로 기소하면서 세계 업체를 대상으로 한 카르텔 조사에 급피치를 올렸다. 특히 세계 시장 선두업체인 삼성SDI를 상대로 압박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양측은 혐의 당사자가 유죄를 인정하면 법원에서 법정 공방을 벌이지 않고 추정된 산업 피해액 범위에서 벌금을 내겠다고 합의하는 이른바 ‘플리 어그리먼트’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CRT 사업에 관여했던 이 회사의 고위 관계자는 “당장 결론이 나지 않겠지만 미 법무부 측과 협상 중인 과징금 규모가 지금까지 삼성SDI가 CRT 사업에서 벌어들인 이익을 모두 까먹을 정도”라며 “협상 진행 내용을 그룹 차원서 예의주시한다”고 전했다.
특히 미 법무부가 CRT 카르텔 조사와 관련해 최근 중화브라운관을 처음 기소했다는 점에서 삼성SDI에 대한 조사도 임박한 게 아니냐는 긴장감이 업계에 고조됐다. 공정거래위원회 관계자는 “국제 카르텔은 각국 경쟁당국과 의견을 교환하지만 과거 반도체·LCD와 마찬가지로 CRT 가격담합 조사는 미국 측이 극도로 보안을 유지한다”면서 “(삼성SDI에 대한 조사도) 상당부분 진척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더 큰 우려는 CRT에 이어 향후 PDP 모듈 시장으로도 조사가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PDP 역시 CRT·LCD 등 여타 디스플레이 업종과 마찬가지로 삼성SDI와 LG전자가 세계 점유율의 절반을 차지하는 시장이다. 또 다른 삼성SDI 관계자는 “통상 미 법무부의 카트텔 조사 관행을 보면 특정 품목에서 시작해 다른 품목들까지 확대해 가는 것이 일반적”이라며 “CRT로 끝나지 않고 PDP 모듈까지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긴장했다. 미 법무부의 카르텔 규제가 국내 디스플레이 산업에 폭탄의 뇌관으로 자리 잡은 셈이다. 가뜩이나 경기 침체가 심화한 가운데 유일한 수출 버팀목인 전자산업 전반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한편 미국·유럽·한국·일본 등의 경쟁 당국은 지난 2007년부터 삼성SDI를 비롯해 일본·대만·미국의 CRT 업체들을 대상으로 카르텔 조사에 착수했으며, 이 가운데 미 법무부가 가장 앞서 강도 높은 조사를 진행 중이다.
서한기자 hseo@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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