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특허전쟁’으로 불리는 애플과 삼성전자의 특허소송은 1등 경쟁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고 있다. 스스로를 지키려고 법정에 제출한 적의 기밀 문서는 물고 물리는 전투의 핵심 무기였다. 살기 위해 상대를 죽여야 하고, 필요에 따라 약속을 저버리거나, 맞잡았던 동지의 손을 놓아야 하는 비즈니스 세계의 냉혹한 현실이 맨 얼굴을 내민다.
◇‘죽여야 산다’=워싱턴포스트는 삼성전자와 애플의 2차 특허소송에서 ‘스티브 잡스의 죽음을 공격할 기회’라고 명시한 삼성전자 내부 이메일이 공개됐다고 최근 보도했다.
마이클 패닝턴 삼성텔레커뮤니케이션아메리카(STA) 부사장이 2011년 10월 7일 작성한 이메일에는 ‘스티브 잡스의 죽음은 애석하지만 그의 비전과 완벽성을 언급한 다수 매체가 애플의 제품이 우수하다는 인식을 봇물처럼 일으켜 의도치 않은 (마케팅) 효과를 줬다’고 분석하며 ‘아이폰을 공격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I know this is our best opportunity to attack iPhone)’라 적은 문장이 담겼다. 불과 이틀 전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경쟁사 수장의 죽음을 마케팅 효과와 사업 기회 관점에서 분석한 것이다. 아이폰4S와 경쟁할 ‘갤럭시S2’ 전략 마련의 과정이었다.
워싱턴포스트는 “삼성전자의 ‘넥스트 빅 싱(Next Big Thing)’ 광고를 기억하나”라 반문하며 광고가 이 같은 전략의 후속 결과물이었다고 전했다. 아이폰을 누를 갤럭시 시리즈란 콘셉트의 이 광고는 크게 히트를 쳤지만 그 내막은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삼성전자가 ‘애플 격파가 최우선(Beating Apple is #1 Priority)’이라고 적시한 2012년 경영 과제 내부 문서도 공개됐다. 4분기에 1220만대의 아이폰을 판매한 애플의 위협이 ‘심각하게 현실적이고 긴급한 상황’이라며 ‘애플이 2012년에 무엇을 출시할 지 파악해야 한다’는 위기 의식이 묻어났다.
제압하지 않으면 내가 죽는 전쟁의 법칙은 스마트폰 선두 경쟁에도 어김없이 적용됐다. 지난주 월스트리트저널은 “애플을 이기는 것은 더 이상 단순히 목표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라고 명시한 삼성전자의 2012년 4월 내부 문서도 전했다. 아이폰5 출시에 앞선 위기감을 드러낸 것으로 손대일 전 법인장은 다음달 “아이폰5가 출현하면 쓰나미가 될 것”이라며 “맞설 계획을 짜야한다”는 이메일로 위기의식을 공유했다.
2차 법정소송에서 애플이 제출한 문서 대부분은 삼성전자가 아이폰을 의식해 작성한 내부 전략을 담고 있다.
◇‘베껴야 이긴다’(?)=삼성전자의 갤럭시 시리즈가 아이폰의 디자인과 기능을 베꼈다는 애플의 주장으로 시작된 이번 소송은 그야말로 ‘베끼기’ 폭로전의 연속이다.
애플의 조나선 아이브 부사장이 만든 초기 아이폰 디자인이 소니 제품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삼성전자의 주장은 2012년 여름 법정을 달궜다. 2006년 애플의 산업 디자이너 ‘신 니시보리’가 소니 같은 디자인의 스마트폰을 준비해야 한다며 3D 모델 도안을 만들었다는 문서가 삼성전자에 의해 공개됐다. 애플은 2005년도에 만든 시제품 ‘퍼플(Purple)’이 원조였다고 반발, 미국 법원은 삼성 주장을 기각했다.
최근 삼성전자가 공개한 여러 문서는 애플조차 삼성전자를 비롯한 안드로이드 제품을 따라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는 점을 드러냈다. 삼성전자가 증거로 제출한 잡스 전 CEO의 2010년 사내 이메일에는 ‘구글과의 성전(Holy War with Google)’이란 문장으로 안드로이드 진영의 위협을 의식해 내부 의지를 다지는 내용이 들어있다. 미국 IT매체 매셔블은 “애플의 임원은 경쟁사의 점유율이 커지는 데 대한 심각한 우려를 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일례로 삼성전자의 슈퍼볼 광고를 본 필 쉴러 애플 마케팅 부사장이 “우리가 아이폰에만 곤두서 있을 때 그들은 해냈다”며 변화를 종용한 이메일도 함께 공개됐다. 삼성의 브랜드 파워 급성장에 ‘광고 대행업체를 교체해야겠다’는 쉴러 부사장의 이메일도 애플 내부의 초조함을 반영한다고 삼성전자는 밝혔다.
작은 화면 사이즈만 고집했던 애플마저 삼성전자 같은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기업 대비 허점을 인지했다. 삼성전자가 제출한 애플의 내부 문서에는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이 우리에겐 없다(Consumers want what we don’t have)’며 큰 화면·저가 제품을 내는 삼성전자를 견제할 제품 출시 필요성이 언급됐다. 또 애플은 2차 법정에서 아이폰이 공개되기 전까지 구글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시제품이 모두 터치스크린을 지원하지 않았다며 ‘베낀 증거’라 내세우고 있다.
2012년의 화룡점정은 ‘S2, i-Phone 비교 평가 결과’라 적힌 2010년 삼성전자 제품기술팀 SW검증그룹의 문서였다. 130여쪽에 걸친 이 문서에는 갤럭시 제품과 아이폰을 비교해 아이폰을 어떻게 참고했는지, 또 아이폰을 모방했다는 느낌을 없애야 한다는 등의 구체적 표현이 담겼다. 문서를 공개한 애플 측의 ‘베끼기’ 주장에 삼성은 일반적인 벤치마킹이라고 반박했다.
애플은 ‘밀어서 잠금해제’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한 삼성전자의 2010년 내부 문서에 아이폰 같은 잠금해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권고 내용이 담겼다고 주장했다. 이에 삼성전자는 2009년에 이미 밀어서 잠금해제 기능이 확정됐다고 반격했다.
◇영원한 동지는 없다=애플을 이기기 위해 구글과 손 잡아야 했지만 또 헤어지려고 했던 삼성전자의 속내도 드러났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삼성전자가 마케팅에서 구글을 활용해 애플을 공격하는 방안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애플이 아이폰4S를 소개하기 일주일 전 삼성 임원들은 ‘구글을 써서 애플을 공격(Use Google to attack Apple)?”이란 주제로 이메일을 주고 받았다는 내용이 이번 2차 법정 소송과정에서 공개됐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 이메일은 글로벌 IT 세계에서 적과 동지가 급박하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반영한다”며 “애플은 삼성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주요 고객이지만 가장 민감한 경쟁자이기도 하다”고 묘사했다.
애플은 삼성전자가 안드로이드OS를 그만 사용하고 자체 OS로 구글에 대항을 모색하는 정황을 드러내는 문서를 공개했다. 비즈니스인사이더는 ‘안드로이드를 그만 쓰고 싶었던 삼성전자’란 제하 기사에서 삼성전자 내부 문서를 인용해 “갤럭시 시리즈가 안드로이드 생태계 덕에 성장했지만 수 년간 자체 OS 개발에 힘써왔다”고 전했다.
표. 법정 소송에서 제출된 주요 문서 (자료:외신종합)
유효정기자 hjyou@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