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도 말고 올해같기만 해라.』
아직 끝나려면 두달 남짓 남았으나 2000년은 모리스 창 TSMC 회장에게 분명히 축복의 해로 기록될 만하다. 회사를 차린 지 13년 만에 올해만큼 좋았던 해는 없었다.
지난해에는 느닷없는 지진으로 낭패를 봤으나 올초 WSMC의 인수작업을 성공적으로 끝냄으로써 출발조짐이 좋았다. 때마침 고객들이 문전 성시를 이뤘다. 얼마나 주문이 넘치는지 일부 물량을 한국 업체에 떠넘겨야 할 정도였다.
지난 8월말까지 TSMC의 매출은 30억달러. 전년 대비 두배 이상 증가했다. 이대로 가면 올해 53억달러 이상의 사상 최대 매출 달성이 무난할 전망이다. 지난해 세계 반도체업계 매출 순위에서 8위에 해당하는 규모다. 20위권에 맴돌던 지난해와 비교하면, 또 파운드리 하나만으로 올린 비약적인 성장이다.
『세계 어디를 눈씻고 봐라. 우리만큼 급성장하는 반도체 회사를 볼 수 있겠느냐』 고희를 눈앞에 둔 모리스 창의 얼굴은 젊은 벤처창업가에서나 볼 수 있는 자신감이 넘쳐난다.
회사의 눈부신 성장도 그렇지만 모리스 창 개인으로도 올해는 좋은 해다.
지난 3월말이다. 신규 6라인 가동 기념식에 참석차 타이난에 가 있던 창 회장은 서둘러 타이베이로 돌아왔다. 며칠전 총통 선거에서 승리한 천수이볜(陳水扁) 당선자를 만나기 위해서다.
천 당선자는 만나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우리는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 정부 자문위원장 역을 맡아주십시오.』
예상했던 것이지만 창 회장은 막상 망설여졌다. 엔지니어로서, 경영자로서 이제껏 잘 지내왔는데 어떤 형태로든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는 게 싫었다.
천 당선자의 설득도 끈질겼다. 『전혀 정치와 무관합니다. 우리는 정보기술산업을 적극 육성하려 합니다. 경륜을 펼쳐주십시오.』
창 회장은 흔들렸다. 『나보다 스무살이나 젊지만 그래로 새로운 국부(國父)의 요청이 아닌가. 정치적인 일도 아니라는데….』 결국 수락했다.
천 당선자가 이토록 창 회장 영입에 목말라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창 회장은 오늘의 대만 반도체산업을 있게 한 인물이다. 국민적 인기도 높다. 「반도체산업의 아버지」를 끌어들여 경제정책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자는 게 천 정권의 생각이었다.
더욱이 창 회장은 또래의 재계 실력자처럼 대륙 출신이 아니다. 대만 출신인 천 당선자로선 같은 대만 출신인 모리스 창을 좋은 재계 협력자로 만들 수 있다.
더 큰 이유도 있다. 천 당선자는 며칠전 리위안저(李遠哲) 중앙연구원장을 행정원장(우리로 치면 국무총리)으로 영입하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역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기 싫다는 이유다.
리위안저는 대만인들에게 처음 노벨상(화학부문)을 안겨준 사람이다. 그만큼 국민적인 존경을 받는 인물이 드물다. 총통선거에서도 각 정당은 그를 끌어들이려 혈안이었다.
천 당선자는 자신의 편에서 민진당의 승리를 결정적으로 도와준 리위안저를 차기 행정원장으로 내정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고사에 부닥쳐 천 당선자는 조각에 골머리를 앓았다.
결국 천 당선자는 울며 겨자먹기로 국민당 출신의 탕페이(唐飛) 국방장관을 행정원장으로 임명해야만 했다. 리위안저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자고 비서진들이 내민 카드가 모리스 창이다.
모리스 창은 어쩌면 「꿩대신 닭」 꼴인 이번 수석 자문직 요청이 얼마간 떨떠름했다. 천 당선자가 풋내기인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사장을 개인 고문으로 영입한 것도 마땅치 않았다.
그렇지만 리위안저 못지 않게 높아진 자신의 위상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또 대만의 반도체산업 환경이 강력한 정부 지원체제에서 민간 위주로 바뀌고 있는 시점에서 업계는 이해 관계를 대변할 강력한 인물을 필요로 했다. 모리스 창은 대만반도체산업협회(TSIA) 회장이다.
창 회장의 명성은 대만 밖에서도 높다. 스탠퍼드 출신인데다 텍사스인스트루먼츠(TI) 등에 근무하면서 쌓은 인맥도 탄탄하다.
그는 지난 6월 국제전기전자엔지니어링학회(IEEE)가 IC 개발자 겸 페어차일드사 설립자인 로버트 노이스를 기려 제정한 노이스상의 첫 수상자의 영광을 차지했다.
이러한 창 회장이 지난 4월말 한국의 제주도를 방문했다. 미국과 일본의 회의체에서 한국, 유럽, 대만 등이 참여하는 글로벌한 회의체로 거듭난 세계반도체협의회(WSC)에 대만 대표로 참석했다.
『이번에는 한국이지만 곧 우리나라도 WSC회의 의장국을 맡게 되리라.』 모리스 창 회장은 WSC 제주회의를 주재하는 이윤우 회장을 지켜보며 이렇게 다짐해 본다.
대만 반도체업계는 미국→일본→한국으로 옮겨진 반도체산업 주도권이 이제 대만으로 넘어올 차례라고 믿는다. 제조비용이 값싼 곳으로 옮겨가는 게 순리 아닌가. 대만은 「준비된」 반도체 국가다.
경쟁 상대인 한국의 반도체산업도 D램을 빼고 나면 보잘 게 없다. 삼성전자, 현대전자 외에는 이렇다 할 업체도 없다.
반면 대만은 TSMC와 UMC라는 세계적인 수탁생산(파운드리)업체가 있다. 세계 파운드리시장의 70%를 장악했다. 아남반도체, 동부전자 등이 대만을 흉내내려 하나 아직은 애송이다.
한국 업체만큼 강력하지는 않으나 대만은 프로모스, 난야, 뱅가드, 윈본드, 파워칩과 같은 D램업체를 여럿 거느렸다.
대만은 무엇보다 기술력도 만만찮다. 남들이 허드렛일이라고 깔보는 파운드리사업으로 다양한 칩을 만들면서 다양한 설계 노하우를 쌓았다. 일부 로직IC 분야에서 대만의 기술은 한국을 능가한다.
대만의 칩 디자인산업은 99현 현재 127개 업체, 20억달러의 매출로 각각 세계 2위다.
또 대만은 일관공정(Fab)뿐만 아니라 반도체패키징, IC설계, 테스트, 웨이퍼, 화학재료 등 분업화가 잘 돼 있다. 특정 대기업의 대규모 Fab에 치우친 한국에 비해 잠재력이 크다.
TSMC의 경우 세계 최대의 반도체업체이며 매년 업계 최대 규모로 투자하는 인텔에 버금가는 44억달러의 설비투자를 추진중이다. 다른 대만업체들도 마찬가지다. 투자 계획 대로라면 웨이퍼 생산량을 기준으로 대만은 곧 세계 최대의 반도체 생산국이 될 수 있다.
대만은 반도체 강국이 되기 위해 중국까지 끌어들일 태세다.
실제로 대만은 전력난과 잦은 자연재해로 반도체사업을 펼치기 쉽지 않은 나라다. 반면 땅덩어리가 큰 중국은 이러한 문제가 없다.
대만 반도체업체들은 물밑에서 대중국 투자를 추진중이다. 일차적으로 해외 제휴선을 통한 우회적인 투자방식이다.
산업화에 나서고 있는 중국정부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있다. 내심 반도체산업을 국가 기간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주룽지 총리는 진두지휘해 「909프로젝트」를 마련했다. 9년안에 반도체산업을 세계 정상에 올려놓겠다는 전략이다. 여기에는 차세대 총리라는 후진타오의 절친한 동지로 전 부총리였던 후추리(胡啓立) 화홍(花紅)그룹 회장이 실무를 맡고 있다.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중국은 오는 2005년까지 상하이에 180억달러(20조원)를 투자해 대규모 반도체 집적회로 생산·가동단지를 조성한다는 전략이다. 상하이는 장장첨단산업지를 중심으로 반도체 칩디자인 개발센터와 생산기지를 조성하는 한편 약 100개 반도체 집적회로 생산업체를 대거 유치해 기반을 다진다는 계획이다. 모토로라, 도시바, 인텔 등 다국적 반도체기업들이 앞다퉈 대규모 투자를 선언하기도 했다.
이에 한국 반도체업체들은 잔뜩 긴장하고 있다. 한국업체들은 재무장에 나선 일본업체보다 사실 대만과 중국업체의 등장이 가장 두렵다. 대만의 자본, 기술과 중국의 생산이 결합하면 엄청난 반도체 파워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기술력에서 한국은 대만과 중국업체를 앞서나 뒤쫓아오는 속도가 만만치 않다. 80년대 한국업체가 미국과 일본업체의 눈치만 살피다가 90년대초 갑자기 세계 D램시장을 석권했듯이 대만과 중국업체가 제 2의 한국이 되지 말란 법이 없다.
천 총통이 당선될 때 까지만 해도 대만과 중국의 양안관계는 살벌했으나 7개월이 지난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중화 반도체 강국」 시나리오는 다시 등장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최근 대대적인 투자 계획 발표도 일본은 물론 대만 메모리업체들의 추격 의지를 꺾기 위한 의도로 풀이됐다.
한국과 대만·중국의 반도체 전쟁이 점화된 것이다. 전쟁은 이미 몇년전에 시작됐다. 지난 98년초, 대만의 난야라는 회사가 한국의 반도체 엔지니어를 통해 D램기술을 빼낸 일명 스파이 사건이 발생했다.
지금도 그 때와 마찬가지라고 보면 오산이다. 대만업체들은 더 이상 한국 기술을 빼내는 데 골몰하지 않는다. 스스로 쌓은 기술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연구개발투자에 대한 부담 때문에 공동 개발에 주력한다. 올초 모젤바텍, 난야, 프로모스 등 6개 반도체 회사 경영자들은 처음 차세대 반도체 개발을 위한 공동개발기구(ASTRO)를 설립키로 합의했다. 이 기구는 올해에만 4억5000만 대만 달러(158억원 상당)를 들여 반도체 회로 제조에 필요한 노광기술, 구리 등 새로운 배선재료와 응용기술을 공동 개발할 예정이다.
또 대만의 반도체업체들은 서로 설계 지적재산(IP)을 공유하는 컨소시엄을 구성해 공동으로 체질 개선에 나섰다.
대만은 국내외의 유력 반도체업체와 긴밀한 제휴, 민관 협력 등의 강점을 바탕으로 12인치 웨이퍼에 대한 선행 투자를 통해 한국에 이은 반도체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야심이다.
그러나 올들어 행복에 겨웠던 모리스 창 회장은 지난달 10일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날 동부 화롄(華蓮)지역에서 큰 지진이 발생했다.
수백마일 떨어진 신주(新竹) 반도체 공장 밀집지역에는 별다른 타격이 없었으나 창 회장은 1년전의 이른바 921악몽(그해 9월 21일 일어난 대규모 지진)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아무래도 대륙으로 옮기는 게 낫겠어.』 창 회장은 이렇게 되뇌며 잠을 재촉했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