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만약 베스트셀러를 만들고 싶다면, 오랫동안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순정파 남자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한 남자만을 사랑하는 여자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는 관객들의 흥미를 끌지 못하지만,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남자는 좋은 이야기 거리가 된다. 영화나 소설의 주 수요층이 여성인데도 이유가 있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소재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소년, 천국에 가다’는 정형화 된 코드들을 약간 비틀음으로써 새로운 재미를 찾은 틈새 영화다. 놀라운 상황의 변화 속에서도 한 남자가 오직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이야기는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 팬터지가 끼어들고 미혼모라는 사회적 약자를 초점에 놓음으로써 영화는 풍부한 울림을 획득하게 된다.
네모(김관우 분)는 13살 소년이다. 네모의 어머니(조민수 분)는 미혼모다. 네모의 어머니는 네모에게 아버지(오광록 분)는 흉악범으로 교도소에 있다고 말한다. 동네에서 작은 시계방을 하던 네모의 어머니가 사고로 죽고, 시계방 자리에 만화방이 들어서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교복 자율화가 시행되고 통행금지가 해제되었으며 칼라 TV가 방송되던 1982년이 시대적 배경이지만, 영화는 전두환 정권의 암울한 시대상황과 정면으로 맞부딪치지는 않는다.
만화방 주인 부자(염정아 분)는 미혼모다. 네모는 부자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그녀에게 결혼해 달라고 프러포즈를 한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보낸 연애편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흉내 내서 부자에게 연애편지를 쓰기도 한다. 부자의 어린 아들과 극장에 갔다가 불이 나자, 부자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네모는 극장으로 뛰어 든다.
여기서 팬터지가 개입한다. 현실적으로 네모는 어린 소년을 구하기 위해 극장으로 뛰어들었다가 죽어야 한다. 그러나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는 염라대왕이, 네모의 아버지다. 네모의 아버지는 사실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고문을 당하고 정신병원에 갇혀 있다.
그의 육체는 병원에 있지만 정신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에서 죽은 자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들 네모가 저승으로 가게 되자, 명부를 고쳐 60년 뒤에 죽는 것으로 바꿔 놓고, 아이를 돌려보내야 한다고 우긴다. 그래서 찾은 타협점이 하루를 일년으로 계산해서 60일 동안 이승에서의 삶을 허락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20일이 흐르고 네모는 33살 청년(박해일 분)이 되어 다시 이승으로 돌아간다. 그는 자신을 네모의 아버지라 속이고 부자에게 접근한다. 자신을 몰래 숨기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접근하는 과정에서 웃음이 발생하지만, 그 웃음은 마냥 가볍지는 않다. ‘소년, 천국에 가다’는 팬터지로 사랑의 위대함을 보여준다.
‘사랑해 말순씨’처럼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소년, 천국에 가다’의 시대적 배경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관객들이 비현실적 팬터지를 심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적 거리를 관객들에게 제공하기 위해서다. 보라색 만화방이나 핑크색 길, 연두색 대문 등 시각적 장식들은 이 영화의 비현실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선택된 것이다. 따라서 이성적 의문, 어떻게 하루를 1년으로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떠올릴 틈도 없이 관객들의 정서는 영화에 흡수되어 버린다.
‘베니씽 트윈’으로 참담하게 데뷔했던 윤태용 감독은 와신상담 끝에 멋지게 재기에 성공했다. 물론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한 당대의 일급 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박찬욱 최동훈 이무영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박해일의 연기를 오히려 압도하는 소년 네모 역의 김관우, 그리고 조각 같은 외모를 망가뜨리면서 관객들의 심리적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는 데 성공한 염정아의 연기력도 이 영화를 재미있게 한 공신이다.
<영화 평론가·인하대 겸임교수 s2jazz@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