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기술 발전의 시계를 뒤로 되돌리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최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의장 폴 앳킨스(Paul Atkins)의 연설이 화제다. 연설 전날 미국을 '크립토의 세계 수도'로 만들겠다는 디지털 자산 시장에 관한 대통령 워킹그룹(President's Working Group on Digital Asset Markets:PWG)의 보고서가 발표되었는데 앳킨스의 연설은 이 보고서에 실린 은행의 디지털 자산 취급 허용 가이드라인 제정, 연방스테이블코인 기본법(GENIUS)의 신속한 이행 등 각종 개혁안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밝히고 있다.
앳킨스의 연설은 역사적으로 SEC가 만들어낸 미국 금융산업의 혁신사례를 조망하는 한편 크립토산업이 가져올 혁신이 미국에 자리잡을 기회를 박탈한 그동안의 SEC 규제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출발한다. 10여년 전 SEC 수장장 매리 조 화이트 (Mary Jo White)가 당시 막 도입된 알고리즘 트레이딩 기법법인 고빈도 트레이딩(High Frequency Trading)으로 소액투자자들이 손해를 입고 있는 상황임에도 “기술발전의 시계를 뒤로 돌리는 시도를 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알고리즘 트레이딩을 금지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유명한 선언을 했듯이 사실 SEC는 혁신을 받아들이는 규제기관이라는 자랑스런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앳킨스는 이러한 전통과 달리 그동안 SEC등 규제기관이 가상자산 사업자의 은행접근을 제한한 이른바 오퍼레이션 초크포인트 2.0(Operation Chokepoint 2.0) 등 다양한 규제를 만든 것을 반성하면서 미국을 떠난 혁신기업가들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법·제도적 환경 구축을 약속했다.
흥미롭게도 은행등 제도권 금융회사들이 크립토 업계와의 거래는 물론 접촉조차도 꺼리게 만든 오퍼레이션 초크포인트 2.0과 같은 유사한 조치가 한국에도 존재한다. 업계에서는 이를 2017년 체제라고 부르는데 실상은 어떠한 행정명령 및 법적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냥 정부합동 보도자료에 기반하고 있다. 이 보도자료는 제도권 금융회사의 가상통화 보유, 매입, 담보취득, 지분투자 모두를 금지하고 있고 이러한 규제로 말미암아 우리의 수많은 크립토관련 혁신 기업들이 한국을 떠나 싱가포르 등지에서 둥지를 틀수 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싱가포르등에 정착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해외에 설립한 법인명칭속에 블록체인 등 크립토 관련 용어가 포함되면 법인 설립에 필요한 송금을 우리 외환당국이 어떠한 법적 근거 없이 불허했기 때문이다. 규제의 방식도 일관성이 떨어졌다.
우리 국민이 해외 가상통화거래소에서 가상통화 현물거래는 물론 투기성이 높다는 선물거래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규제가 없는데 오히려 외국인이 우리나라 가상자산거래소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한 이상한 조치 역시 보도자료에 불과한 2017년 체제로 시행되고 있고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 조치는 스테이블 코인이 유행하면서 큰 부작용을 낳고 있다. 외국 가상거래소에 참여하기 위해 내국인들은 달러화 스테이블코인인 테더(USDT)와 서클(USDC)이 필요했기에 내국인들의 달러화 스테이블코인의 수요를 크게 높여 놓았고 이렇게 범용성을 확보한 달러화 스테이블코인은 이제 송금, 무역거래, 소액결제등으로 확산되면서 우리의 통화주권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확산에 놀라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지만 외국인들의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수요를 높일수 있는 외국인의 국내 가상자산거래소 시장에 참여 허용에 대한 논의보다는 발행 자격에 대한 논의가 주류를 이루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국내상황에도 이재명 정부 첫 국빈 방문인 베트남 정부의 재무부 장관 등 장관급들이 우리 가상자산 거래소를 방문해 기술지원을 요청했다.
아직까지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는 국내거래소들에 대한 불합리한 규제를 바꾸는 것이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과 같이 논의돼야 할 시점이다. 앳킨스의 연설이 더 인상적인 점은 미국의 정책이 단순히 가상자산업계에 대한 규제완화 차원이 아니라 기존의 중앙화 및 중개자 모델인 증권거래 시스템을 탈중앙화 및 탈중개자를 지향하는 크립토와 블록체인 시대에 맞춰 전면적인 개편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중앙화 모델인 거래소와 병렬적으로 스마트 컨트랙트(Smart Contracts)를 장착한 블록체인 기반 금융인 디파이(DeFi)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의 면허를 가지고도 증권형 토큰, 비증권형 토큰은 물론 전통적인 증권을 거래할 수 있는 이른바 슈퍼애플리케이션(앱)(Super App)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많은 정책적 시사점을 던져 주고 있다. 미국도 과거에는 우리나라의 한국거래소(KRX)와 같이 NYSE와 NASDAQ이라는 두개의 공공기관형 거래소 시스템이었지만 2005년 기술발달을 수용해 많은 거래소와 사설 거래소(대체거래소 및 다크 풀)의 설립을 허용했다. 이로 인해 현재 24개의 거래소와 30여개의 사설거래소들이 자본시장의 사명이라고 할 수 있는 자본형성에 기여하고 있다. 앳킨스의 슈퍼앱 구상은 한 단계 더 나아가 하나의 플랫폼에서 다양한 상품이 거래될 수 있는 변혁을 선언한 것이다. 아직도 미국의 구체제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 자본시장법에 근거한 유일한 '장내' 시장인 공공기관성의 KRX를 유지하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부러울 따름이다.
투자자 입장에서 보면 큰 차이를 못느끼는 넥스트트레이드의 경우 거래소가 아닌 금융투자업자로 다자간매매체결업(ATS)이라는 인가를 받은 회사로 경쟁매매 시장임에도 KRX를 지칭하는 '시장' 및 '장내'라는 용어를 쓸수 없어 아닌 마치 '장외'시장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 가상자산거래소의 경우 아예 거래소도금융투자업자도 아닌 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특금법)에 기반한 가상자산 매매 및 교환업자에 불과하다. 법이 이렇다 보니 앞으로 출현할 많은 혁신적인 새로운 거래플랫폼들이 '장외'라는 이름을 받아들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유재수의 특이점(Singularity) 시대]〈1〉크립토와 블록체인이 이끄는 디지털금융 시대](https://img.etnews.com/news/article/2025/09/10/news-g.v1.20250910.003101450b4c45d29127b06df3b234c4_P1.jpg)
우리의 경우도 미국처럼 거래소 법제도에 대한 획기적인 개선이 필요한 시점이다. 아직도 워드 및 한글 소프트웨어(SW)를 보면 저장버튼이 3.5인치 플로피 디스크 모양을 하고 있다. 이를 못보고 자란 우리의 젊은이들은 왜 저장버튼 모양이 그렇게 생겼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 금융법의 상당히 많은 조항이 이들 젊은 혁신가들에게는 이 저장버튼과 같을 것이다. 우리가 직면한 인공지능(AI), 크립토와 블록체인이 이끄는 디지털 금융세계는 먼 미래가 아니다. 현실은 이미 AI 기반 트레이딩이 전통 거래 기법을 압도하고 스테이블코인 등 크립토 커런시가 기본 금융시스템을 흔들고 있고 DeFi(탈중앙화 금융)의 활용도가 높아지고 있다. 금융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기존 금융법제야 말로 특이점 시대'에 직면했다고 말하고 있다. 과거에 기준을 두고 새로운 것을 예외로 인정하기 보다는 과거와 새로운 것이 모두 올라설수 있는 제대로된 법적 토대를 마련할때가 왔다.
얼마 전 존홉킨스대 교수이자 저널리스트인 독일계 미국인 야사 뭉크(Yascha Mounk)가 서브스택(Substack)에 기고한 글에서 유럽은 스스로를 AI 분야에서 세계를 이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실상은 세계적인 AI 기업은 전부 미국계이고 유럽은 그저 AI로 인해 야기된 문제를 제어할 '규제를 만들어 내는 것'에서 세계를 이끌고 있다고 꼬집은 바 있다. 사실 우리도 유럽의 규제를 참조해 금융산업에서 AI활용과 관련된 가이드라인이 만들고 있다. AI 산업을 미래 성장동력으로 삼으려면 개인정보보호법, 망분리 등 기존 규제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지 새로운 규제의 도입이 우선시되면 우리의 소버린 AI 전략은 요원하고 유럽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마침 새 정부가 금융감독체제의 변화를 추진하면서 새로운 금융감독정책 수장들을 잇달아 선임하고 있고 권대영 금융위 부위원장 등 폴 앳킨스 못지 않은 뛰어난 금융관료들의 활동에 대통령의 칭찬이 이어지고 있다. 이제 우리 금융당국도 AI 시대에 걸맞는 혁신을 이끄는 규제기관으로 도약할 시점이다. 왜냐하면 금융에서 특이점의 도래는 단순한 예측이 아니라 이미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유재수 싱귤래리티 금융 소사이어티(SFS) 간사 yoojs64@gmail.com
〈필자〉 유재수 간사는 전통 금융과 신기술 기반 미래 금융의 접점을 짚고, 정책·산업계의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 전문가 모임 '싱귤래리티 금융 소사이어티(SFS)'를 출범, 운영하고 있다.
SFS는 미래 금융 생태계 변화와 기술 실체, 방향성에 대한 검토, 정책적 해법과 제도적 대응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할 계획이다. 특히 인공지능(AI)·블록체인·암호화폐·양자컴퓨팅 등 첨단기술이 금융과 융합되며 만들어내는 구조적 변화, 이른바 '금융의 특이점(Singularity in Finance)'을 핵심 주제로 삼는다. 단순한 기술 트렌드가 아닌, 금융 개념과 시스템 전반을 다시 쓰는 전환기라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기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