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철학 거두 '하버마스' 96세로 별세...현대 지성사의 한 시대 막 내려

공론장·의사소통 행위이론으로 세계 학계에 영향
위르겐 하버마스. 사진=연합뉴스
위르겐 하버마스. 사진=연합뉴스

독일을 대표하는 사회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가 향년 96세로 별세했다.

독일 출판사 수어캄프는 하버마스가 14일 독일 남동부 바이에른주 슈타른베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하버마스는 “19세기에 마르크스가 있었다면 20세기에는 하버마스가 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현대 서구 지성사에 큰 영향을 끼친 사상가로 꼽힌다.

독일 통신사 디피에이는 하버마스가 공론장 개념을 중심으로 민주사회를 조직하는 데 적합한 담론의 형태를 탐구하며 전후 독일의 지적 분위기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그가 제시한 공론장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토론하고 의견을 형성하는 공적 공간을 의미한다. 하버마스는 18세기 유럽 부르주아 살롱에서 시작된 공론장이 20세기 들어 대중 매체 중심의 공적 공간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분석했다. 이러한 논의는 나치 독일의 통치를 겪은 뒤 처음으로 자유로운 정치 토론을 경험한 전후 서독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버마스는 1929년 6월 독일 뒤셀도르프의 개신교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취리히대와 본대 등에서 철학과 심리학, 독일 문학, 경제학 등을 공부했으며 이후 언론인으로 활동하다가 프랑크푸르트사회연구소에서 학문적 경력을 본격적으로 쌓았다.

그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대표 사상가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비판 이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해 의사소통 합리성과 생활세계 등의 개념을 제시했다. 이러한 이론은 사회철학을 넘어 현대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81년 출간된 대표 저서 의사소통 행위이론은 현대 철학의 기념비적 저작으로 평가된다.

하버마스는 학문 연구에만 머물지 않고 수십 년 동안 현실 정치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한 참여형 지식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1980년대 독일에서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유럽 전쟁과 폭력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일부 역사학자들의 주장으로 논쟁이 일자 그는 역사적 과오를 직시하고 반성하는 과거사 청산을 독일 국가 정체성의 핵심 가치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논쟁을 거치며 독일 사회는 과거의 과오를 지속적으로 반성하고 사죄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버마스는 최근 독일에서 나치에 동조적인 극우 세력이 부상하며 이러한 반성 문화가 도전을 받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우려를 나타낸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독일 뮌스터대 교수였던 제자 송두율 교수가 2003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자 서울지방법원에 석방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보내는 등 구명 활동에 나서 한국에도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또 독일 민족주의의 부활을 막기 위한 장치로 유럽 통합을 강조한 대표적인 유럽주의자로 평가된다. 그는 유럽연합의 정치적 통합을 강화하기 위해 유럽연합 전체 국민이 참여하는 국민투표 실시를 제안하기도 했다.

종교의 세속화를 강조해온 그는 말년에 종교가 현대 사회에서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언급하는 등 사상적 변화도 보였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신중한 군사 지원과 러시아와의 협상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혀 논란이 되기도 했다.

미국 통신사 에이피는 하버마스가 선천적 구개열을 안고 태어나 어린 시절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으며 이러한 경험이 언어와 의사소통에 대한 그의 철학적 관심에 영향을 미쳤다고 전했다.

하버마스는 본대 시절 동창이었던 우테 베셀회프트와 1955년 결혼해 지난해 아내가 별세할 때까지 70년 가까이 함께 살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세 자녀가 있으며 역사학자였던 막내딸은 2023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김명선기자 kms@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