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이 만난 생각의 리더]<29>벤처신화 조현정 비트컴퓨터 회장

조현정 회장은 “청년들은 스펙쌓기보다는 스킬이 중요하다”며 “남이 하지 않은 일을 하는 창의인재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박지호기자 jihopress@etnews.com
조현정 회장은 “청년들은 스펙쌓기보다는 스킬이 중요하다”며 “남이 하지 않은 일을 하는 창의인재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박지호기자 jihopress@etnews.com

사진=박지호기자 jihopress@etnews.com

그는 열정으로 인생 먹구름을 빛으로 만든 벤처인이다. 집안이 몰락해 중2 때 서울로 와 가전수리공을 했다. 그는 이를 ‘고난의 행군’이라고 했다.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하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교수와 일류 기술자도 못 고친 방사능측정기를 일주일 만에 수리했고 학생 신분으로 본관 1층에 연구실을 배정받았다. 학교 내 모든 교육기자재와 앰프시설을 총괄 관리해 1년에 400만원을 받았다. 대학 3학년 때 한국 처음 소프트웨어(SW)개발업체를 창업했다. 이듬해 번 돈이 1억7000만원이었다.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25억원쯤 됐다.

조현정 비트컴퓨터 회장은 ‘한국 벤처 신화(神話)’로 불린다. 그가 가진 국내 1호 타이틀만 100여개다. 한국 대학생 창업 1호, SW업체 설립 1호, 벤처기업 1호, 병역특례 업체 1호, 오피스텔 창업 1호, 테헤란로 입주기업 1호가 대표적이다. 창의(創意)사고의 결과물이다.

그는 인재양성과 부(富)의 사회 환원에도 앞장섰다. 1990년 8월 비트교육센터를 설립해 SW 인재교육 메카로 만들었다, 2000년에는 조현정 재단을 설립했다. 그는 정치권이 가장 탐내는 영입인사 영순위다.

조 회장을 8월 31일 오후 2시 서울 강남 비트컴퓨터 6층 회장실에서 만났다. 그는 기업인에게 초심(初心) 경영을 당부했다. 젊은이들에게는 “‘스펙’ 쌓기보다는 ‘스킬’이 중요하다”며 “최고가 되려면 남이 하지 않은 일을 하는 창의인재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형 태극기가 눈에 띈다.

-사기(社旗)는 보이지 않고 태극기만 있는데.

▲태극기는 국가의 상징이다. 1997년 11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국가부도 사태가 발생하자 ‘기업가로서 뭘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IMF 다음날 출근하자 태극기를 사오라고 했다. 그날 이후 출근하면 태극기를 만지고 내 자리에 앉아 일을 시작했다.

그의 태극기 사랑은 1998년 2월 MBC ‘성공시대’에도 소개됐다.

-애국심이 남다른데.

▲미국 영주권을 가지고 있던 두 아들은 입대를 안 해도 되지만 모두 군에 보냈다. 젊어 고생은 사서 한다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어려운 일은 안 하려고 한다. 둘째는 시력이 나빠 4급 판정을 받았지만 눈 수술을 하고 인공렌즈를 넣어 군에 보냈다. 큰애는 육군본부에서 프로그램 개발병으로 근무했다. 제대할 때 참모총장상을 받았다.

조 회장은 역경을 딛고 성공한 기업인이다. 김해 한림면 면장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대지 2000평이 넘는 큰 집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여섯 살 때 돌아가고 집안이 몰락해 열 다섯 살인 1971년 3월 상경했다. 부엌도 없는 단칸방에서 생활했다. 어머니는 바느질을 했고 그는 월급 3000원을 받고 충무로 가전제품수리센터에서 일을 했다. 당시는 가전 3사 대리점이 없었고 당연히 사후관리(AS) 개념조차 없었다. 전파상에서 못 고친 제품을 수리해 ‘꼬마 일류 기술자’로 소문이 났다.

“1973년 여름 제품 수리만 해 줄 게 아니라 내가 설계한 제품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됐다.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공부와 담을 쌓았던 그는 6월부터 3개월간 두문불출하며 공부에 매달렸다. 이웃에서 싸움이 나도 나가지 않았다. 고입검정고시에 합격해 용문고를 졸업하고 인하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했지만 등록금이 문제였다.

학교에 일을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학교시계탑은 시간이 제멋대로였다. 그는 원인을 찾아 디지털로 부품을 교체해 시간을 맞췄다. 학교 측은 당시 교수와 기술자도 못 고친 방사능측정기를 고쳐달라고 했다. 그는 일주일 만에 고쳤다. 학교는 그에게 실습기자재 수리와 관리를 맡겼다. 강의실용 이동앰프도 그가 만들었다. 그는 학교에서 1년에 400만원을 받았다. 학교는 그에게 본관 1층에 연구실을 내줬다. 교직원 통근버스도 이용할 수 있었다.

“당시 동대문구 이문동에서 통근버스가 출발했는데 맨 뒤 의자에 앉아 잤다. 1980년 비상계엄령이 내려 대학이 휴교할 때도 나는 학교 출입을 했다. 친구들 짐도 빼주곤 했다.”

대학 3학년 1983년 8월 15일 청량리에 있는 맘모스호텔 방을 빌려 창업했다. 자본금 450만원에 직원은 두 명이었다. 국내 최초로 ‘의료보험청구 프로그램’을 개발, 공급했다.

“사업자 등록을 하러 세무서에 갔다. 당시 그럴 필요가 없었다. 고객인 병원 측도 싫어했다. 세원이 노출되면 세금을 더 내야 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납세는 국민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투명경영을 한다.”

그는 1985년 테헤란로로 사무실을 옮겼다. 1호 입주였다. 1988년 한국이 서울올림픽을 개최하자 그는 조직위를 찾아가 자원봉사를 자청했다. 조직위에서 “성화 봉송 프로그램을 개발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당시 성화 봉송 행사가 전국 주요 도시로 확대되면서 주자만 2만5000명에 달했다. 그는 선수 사진과 음성까지 보고 듣는 성화 봉송용 멀티미디어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이 프로그램은 해외 언론이 주요 뉴스로 다룰 정도로 주목받았다.

1989년 아시아월스트리트저널에서 1면 톱기사로 비트컴퓨터를 소개했다. 기사를 본 당시 한승수 상공부 장관이 전화로 “뭘 도와줄까”라고 물었다. 그는 “SW업체도 병역특례로 지정해 달라”고 건의했다. 당시 병역특례는 방위산업체만 해당했다. 그의 제안으로 비트컴퓨터는 국내 첫 번째 병역특례업체로 지정받았다.

사진=박지호기자 jihopress@etnews.com
사진=박지호기자 jihopress@etnews.com

-비트교육센터 설립은 언제부터 준비했나.

▲1990년 8월 비트컴퓨터 부설 C교육센터를 설립했다. 당시 95%가 코볼(COBOL)이었다. 시스템연구소 강남 분원에서 코볼을 교육했다. C언어를 하는 사람은 전국에 100명도 안 됐다. 민간교육기관에서 처음 C언어를 가르쳤다. 당시 워크스테이션 한 대가 600만원 했다. 6개월간 주말 없이 1800시간을 교육한다. 항상 새로운 내용을 가르친다.

-지금까지 몇 명의 교육생을 배출했나.

▲8700명을 양성했다. 취업률 100%다. 수료식이란 말 대신 비트출신입단식이라고 한다. 2000년 10주년 기념식을 했다. 배출한 3920명 중 1400명이 참석했다. 안병엽 당시 정통부 장관이 참석했는데 다른 일정 두 건을 취소하고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코엑스 인터컨티넨탈호텔 그랜드볼룸 최초 사용자가 우리다. 교육생들은 교수, 창업 기업인, 직장인과 같이 다양하다.

-장학재단은.

▲여러 방법을 고민하다 2000년 1월 조현정재단을 설립했다. 전국 고교장 추천을 받아 2배수로 뽑아 내가 직접 면접해 선발한다. 부모 재산세 합산액이 20만원 미만인 사람이 대상이다. 한 사람당 1000만원을 지원한다. 부산 기장 출신 한 학생은 교사 꿈을 버리고 서울대를 졸업하고 OECD 인턴 1년을 근무한 뒤 프랑스로 석사학위를 받으러 떠났다.

-지금까지 몇 명이 장학금을 받았나.

▲올해 15명을 포함해 250명이다. 졸업생들은 창업하거나, 의사, 법조인, 행정공무원, 경찰, 군인, 금융인, 교수, 언론인과 같이 다양하다. 석창규 SW공제조합 이사장이 장학생 모임에 한 번 참석하더니 ‘올해부터 10년간 매년 세 명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겠다’고 밝혀 올해 세 명을 더 선발했다. 정말 고맙다.

-대학졸업자 취업난이 심각하다. 스펙 쌓기가 유행인데.

▲스펙 쌓기는 이제 변별력이 없다. 이제는 스킬이 중요하다. 스킬은 문제해결 능력이다. 스킬이 좋으면 스펙이 부족해도 취업할 수 있다. 지금 있는 직업도 20년 이내에 많이 사라진다. 대기업 취업도 한계가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남들이 하지 않는 일,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 창의인재가 돼야 한다. 미국 청년 창업률은 최고다. 중국은 하루에 1만개씩 창업한다고 한다. 우리는 벤처기업이 3만1000개다. 중국 3일치다. 스킬 없이 창업하면 사상누각이다. 지금은 삼창(三創)시대다. 창업(創業)과 창조(創造), 창직(創職)이다. 항상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생각하고 미래시대 길목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 대학생에게 각종 전시회에 가보라고 권한다.

-벤처인에게 당부의 말은.

▲초심(初心) 경영을 해야 한다. 창업할 때 가졌던 초심을 잃으면 수성(守成)에 실패한다.

-지난번 광복절 70주년 특별사면에 SW업종이 처음 포함됐던데.

▲제안은 우리가 했고 미래창조과학부가 추진을 했다. 100개 기업이 사면을 받았다. 더욱 잘하기 위해 8월 20일 SW중심사회를 위한 준법경영다짐대회를 개최했다. 일자리 창출 4000명 이상과 500억원 이상 연구개발 자금을 추가 투자하기로 결의했다. SW산업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 기대를 반영한 조치라고 생각한다.

-정치할 생각은 없나.

▲기업하다 왜 정치를 하나. 나는 SW 구루(GURU)로 남고 싶다. 이타심을 갖고 생태계를 만드는 데 이바지하고자 한다. 기업가는 기업을 해야 한다.

-좌우명과 취미는.

▲선우후락(先憂後樂)이다. 먼저 근심하고 나중에 즐기라는 의미다. 취미라면 상상하기다.

그의 손은 온통 흉터투성이다. 어릴 적 가전수리공으로 일하면서 베인 영광의 상처다. 그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죽겠다거나 스트레스 받는다는 말은 절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SW산업협회와 벤처기업협회 설립을 주도했고 3대 벤처기업협회장을 역임했다. 한국SW협회장은 2년 임기를 끝냈지만 지난 2월 24일 재선임됐다.

이현덕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