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칼럼]축적의 시간

[전문기자칼럼]축적의 시간

2조원을 들여 23㎞ 길이로 건설한 국내 최장 다리인 인천대교. 한국 건설사 쾌거로 기억되는 인천대교 핵심구조 설계를 일본 기업 조다이사가 맡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는 파도와 지진, 해류, 교통량을 견뎌낼 수 있도록 기반 구조를 디자인할 '개념설계' 역량을 가지고 있지 않다. 전체 건설비용 10% 이상을 무형 자산에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가 세계 1위를 차지하는 반도체, 이동통신, 발전 산업 역시 실상을 들여다보면 핵심 개념설계는 외국 것을 가져다 쓰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익의 10~20%가량을 외국 기업이 앉아서 버는 구조다.

서울대 공대 교수 26명이 공동 집필한 '축적의 시간'은 이 같은 한계 극복을 위해 개념설계를 우선하는 방향으로 우리 정부와 산업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개념 설계 역량을 얻기 위해선 실패와 시행착오, 과정과 결과를 꼼꼼히 쌓아가는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새롭게 접하는 문제에 대해 당장 성공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개념을 해법으로 제시해보고 실패해도 시행착오를 기록해 성공의 밑거름으로 남겨야 한다. 당장 필요한 기술을 한 번에 사들여와 모든 것을 얻기보다 근본이 되는 원천기술에 지속적으로 조금씩이라도 투자하는 노력을 이제라도 시작해야 한다.

축적의 시간은 옛 미래창조과학부에서 유독 큰 공감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정보통신기술(ICT) 분야는 10년 동안 부처 명칭과 조직이 3번이 바뀌는 등 부침이 심했다. 정치권이 정책방향과 이해관계에 따라 조직을 붙이거나 떼더라도 공무원 스스로 정책 역량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유영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도 초반 축적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는 듯 했다. 유 장관은 취임 당시 “실패한 연구개발 성과를 성공으로 연결 짓기 위해 빅데이터화하는 정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출범 초기인 과기정통부가 개별 분야가 아닌 정책 전반의 역량을 축적하는 노력을 시작했는지는 의문이다.

과기정통부는 첫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자리인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4차산업혁명위원회를 성공적으로 안착하겠다고 제시했다.

세부 청사진이나 운영방향이 없다며 언론의 비판을 받았다. 더 큰 문제는 이전 정부 창조경제에서 계승 또는 버려야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평가를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이전 정책에 대한 평가 없이 새로운 청사진이 나올 리 만무하다.

통신비 정책도 마찬가지다. 역대 미래부 장관은 국회에서 기본료 폐지 정책을 왜 추진하지 않느냐는 질타를 받을 때 “경쟁 활성화를 통해 통신비를 낮추겠다”고 답했다. 이제는 “국민 모두의 가계통신비 부담을 줄여야 한다”고 한다.

핵심 통신정책 방향을 경쟁활성화에서 국민 보편 복지혜택으로 가겠다는 변화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이 부족해서 정책이 변화했는지 평가와 반성이라는 '과정'은 생략된 것으로 보인다.

축적을 위해선 처음이 중요하다. 축적은 미래를 위한 자산이며 결심한 순간부터 기록하고 평가해야 자산이 그만큼 늘어난다. 문재인 대통령이 살충제 달걀 파동 전 과정을 백서로 기록하라고 지시한 것도 실패 경험을 미래 자산으로 남기기 위한 조치다.

과기정통부가 야심차게 내세운 4차산업혁명위원회, 통신비 정책을 두고 잡음이 지속한다. 이전 정책 한계와 계승점을 분석하는 축적의 과정이 생략된 것이 큰 이유 중 하나다.

박지성기자 jisu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