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 온고지신]<101>철학 있는 과학기술정책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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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무 정 ETRI IT신소재연구실 책임연구원 mjc@etri.re.kr

영원할 것만 같던 여름이 마침내 물러났다. 하지만 유난했던 더위가 남긴 상흔은 적지 않다. 손바닥 만 한 마당의 꽃과 잔디도 가뭄과 열기에 누렇게 떴다. 초록색으로 보이는 것은 전부 잡초다. 잔디가 저 잡초만큼만 잘 자랐으면 하는 안사람의 말에 `잡초도 막상 키워보려고 하면 잘 안자란다`고 하던 원예 전문가 말이 기억난다.

[사이언스 온고지신]<101>철학 있는 과학기술정책을 그리며

우리는 질서 정연하고 일사불란하며, 체계적·논리적이고 예측 가능한, 그리고 낭비 없이 효율적인 시스템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오죽하면 상대론의 창시자 아인슈타인 박사도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라면서 양자론 기본 개념을 거부했을까.

이처럼 세상을 대할 때 극단의 두 측면이 대립된다. 가만히 놔두면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열역학 제2법칙은 우리에게 간섭의 유혹을 떨쳐내기 어렵게 만든다. 또 한편으로 자연 속에는 항상 잉여가 존재함을 발견한다. 20대 80의 법칙을 제공하는 개미집단 속의 80이 사실은 미래를 대비하는 예비군이라는 흥미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자연 속에 내재되어 있는 잉여는 낭비가 아니라 지난한 시간 속의 시행착오 속에 터득한 지혜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국민 세금으로 운영하는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간섭내지 통제`와 `시행착오 위한 잉여`라는 타협될 수 없는 두 가지 극단이 오랜 시간 티격태격 전쟁을 해왔다.

연구개발 자금이 인류의 미래 또는 국부 창출을 위한 투자냐 비용이냐 하는 문제다. 전자는 자식 농사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고, 후자는 공작기계를 연상케 한다. 자식농사는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것이고 공작기계는 오작동을 하지 않는 한 결과가 자명한 것이다.

과학기술은 자식농사를 짓는 것과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자식농사는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각오 해야만 하는 것임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자식이 하고 싶은 대로 방치해 두는 부모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성장하게 된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인류에 큰 공헌을 하고 있는 사람의 이면에는 자식을 대하는 훌륭한 부모들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훌륭한 부모들은 대체적으로 삶에 대한 자신만의 독특한 철학이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국가사회에 기여를 목표로 하는 과학기술 정책 또한 이와 같아야 함을 직감한다.

과학기술정책은 국가의 경쟁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기여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다. 경쟁력은 독보적인 것에서 나온다. 독보적인 것은 어떤 방향성에 대한 축적된 힘이다. 이러한 축적된 힘은 하루아침에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의 정성과 노력이 투자되는 가운데 길러지는 것이다.

축적된 힘이 독보적이기 위해서는 유일성이 있어야만 한다. 겉으로 보기엔 비슷해 보이지만 남들이 따라 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런 유일성은 끊임없이 방향성을 점검하는 철학적 토대 위에서 나온다. 철학은 트렌드나 유행에 휩쓸리지 않는 중심추가 존재한다. 자신의 몸에 맞는 중심추가 있다. 선진 국가는 각기 자신들만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과학기술정책이 있다.

압축성장을 해 온 우리나라의 경우, 선진국과는 다른 색깔의 과학기술정책이 필요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산업적 성과를 내는 것이 중요한 덕목이기에 정권에 따라 매번 옷을 갈아입는 모습을 마냥 비판만 하고 있을 수 없는 것이 우리가 처한 특징일 수 있다.

그러나 무역 10대 강국이라는 대국의 위치에 올라 선 대한민국도 이젠 지속가능한 국가의 발전과 사회문화 융성에 기여하는, 한 단계 성숙한 과학기술정책을 고민해야 할 시점에 왔다.

정부 출연연구기관들은 당연히 멋진 몸을 만들고 멋진 정신을 만드는 축적의 역할, 국가사회의 저력을 축적하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어야 한다. 압축성장 화려함 뒷면에 엄습해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기댈 언덕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다. 출연연 연구요원들을 각자도생의 늪에 몰아넣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그들은 국가와 사회를 구할 최후의 비밀병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