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투데이>(5)페어차일드와 페어칠드런

유명 반도체 연구진 윌리엄 쇼클리의 가혹한 경영방식은 반도체 연구팀 엔지니어 8명의 집단 반발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들의 가능성을 간파한 아서 록 이스트코스트 투자회사 서부지역 책임자는 페어차일드 카메라와 코네티컷 인스트루먼츠사로부터 자금을 확보, 페어차일드사의 설립을 돕게 된다.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그 뒤 미국 국방성 등에 납품하는 방위 산업체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것은 창업자들이 바랐던 사업 방향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들이 방위산업을 했던 가장 커다란 이유가 동부 쪽에서 자금을 대고 있던 모회사들의 압력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났던 것이다. 당시 동부의 자금줄들은 페어차일드와 같은 사업에 대해 생소해 투자를 빨리 회수할 심산으로 경영 등에 간섭하면서 이처럼 사업 방향이 틀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이 회사는 몇 가지 주요 관점에서 오늘날의 실리콘 제국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첫째,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회사 문화다. 이 문화는 자유 분방한 의견교환과 기술의 잠재력에 관한 뜨거운 열의, 당시 미국 주식회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실패에 대한 관용을 베풀었다. 이 같은 특성은 모두 오늘날 실리콘밸리의 기업 문화의 특이성과 일치한다.

둘째, 끝없는 페어차일드 종업원들의 창업 행렬이다. 1968년에는 모두 떠나간 당초 8명의 창업 멤버들, 그리고 이들에게 고용돼 교육을 받고 영감을 물려받은 수십명의 재능 있는 젊은 엔지니어들은 계속해 수십개 회사를 세웠다.

이들은 「페이차일드의 아이들(Fairchildren)」이라고 불리며 첨단 반도체 기술뿐만 아니라 이 회사의 특이한 문화를 널리 확산시킨 실리콘밸리의 개척자들로 꼽힌다.

<로버트 노이스>

특허 번호 2,981,877은 오늘날의 실리콘밸리라는 단어를 만들어 낸 번호다. 1958년 중부의 텍사스인스트루먼츠사의 잭 킬비와 캘리포니아주 마운틴 뷰에 위치했던 페어차일드세미컨덕터사의 로버트 노이스는 각각 이른바 칩(Chip)을 만드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당시의 전자 엔지니어들은 디지털의 가능성에 대해 인식하고는 있었지만 회로를 더 발전시키는 데는 한계에 부딪혀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한정된 부피로 회로를 디자인하기 위해 필요한 구성 요소들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 한계는 엔지니어들 사이에서 이른바 번호의 폭정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로버트 노이스가 노벨상 수상자인 윌리엄 쇼클리의 쇼클리반도체연구소로 들어간 것은 1956년 28세 때였다. 괴팍한 쇼클리의 가장 많은 신임을 얻은 노이스는 그러나 1957년 팀원들과 함께 페어차일드반도체사의 설립에 동참한다.

그리고 노이스는 1959년 최초로 상용 집적회로(IC) 개발에 성공, 같은 해 7월 특허를 신청했다. 하지만 댈러스 텍사스인스트루먼츠사의 잭 킬비가 한 발 더 빨랐다. 그는 이미 2월에 IC 특허를 신청해 놓았던 것이다.

두 사람이 개발한 IC는 기본 회선구조에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다만 반도체 성분에 있어 킬비는 게르마늄(Ge)을, 그리고 노이스는 실리콘(Si)을 각각 사용했었다. 텍사스인스트루먼츠사와 페어차일드사는 IC에 대한 특허권을 놓고 10년 가까이 법정싸움을 벌이게 된다. 그리고 이 싸움은 결국 양사가 크로스 라이선싱(상호 특허허용)을 인정하면서 막을 내린다. 그리고 노이스는 1968년 골든 무어와 함께 페어차일드에서 독립, 인텔사를 설립한다.<테리리기자 terry@ibiztod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