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보는 세상] 순정만화 속 여주인공

[만화로 보는 세상] 순정만화 속 여주인공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는 우리 만화는 세상에 대한 풍자와 궤를 같이하며 성장했다. 일제 강점기 어두운 현실을 신랄하게 풍자하면서 만화는 시작됐고, 국민 만화 아기공룡 둘리 속에서도 사회 풍자는 빠지지 않았다. 만화를 어린이들의 문화로 치부하는 사람들은 만화를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거나, 만화가 품은 다양한 세계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이들일 것이다. 만화계에서 내로라하는 네 명의 필자가 만화사, 시사만화, 순정만화, 웹툰을 아우르며 우리가 보지 못한 우리 만화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과거 사극 드라마 속 여자 주인공은 보통 ‘장희빈’이나 ‘장녹수’처럼 남성을 성적인 매력으로 유혹해 세상을 혼란하게 하는 요부거나, ‘인현왕후’처럼 한없이 착하고 선해 남성이 지켜주지 않으면 홀로 설 수 없는 연약한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공전의 히트를 한 ‘대장금’ 이후 이제 사극 드라마에서 여자 주인공은 더 이상 남성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으로 세파를 헤쳐 가는 꿋꿋한 캐릭터로 자리 매김한다. 특히 요즘 높은 인기를 끌고 있는 ‘선덕여왕’은 ‘미실’(고현정 분)-‘덕만’(이요원 분)-‘천명’(박예진 분)의 갈등이 극을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니, 사극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의 높아진 위상을 실감할 수 있다.

 사극 드라마 속 여성의 모습은 2000년대에 들어서야 주체적인 모습을 지니는 캐릭터로 그려졌지만 사실 순정만화 속에서는 훨씬 이전부터 여자들이 주인공인 사극, 즉 시대극 속에서 꿋꿋한 주인공 역할을 해 왔다.

 대표적인 한국 순정만화의 시대극이라고 할 수 있는 신일숙 작가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보자. 1986년 첫선을 보인 이 작품은 BC 480년께, 세계의 패권을 거머쥔 페르시아와 페르시아가 가지지 못했던 나라 그리스, 그리고 그 사이에 낀 가상의 나라 아르미안을 배경으로 해 시대적 고증과 작가의 상상력이 꽃을 피운 작품이다. 아르미안이 여왕의 네 명의 딸인 ‘마누아’ ‘와스디 스와르다’ ‘아르파샤’ ‘샤르휘나’가 이 작품의 주인공인 셈인데 이 네 명의 여성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본인들의 삶을 이끌고 나가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특히 막내인 ‘샤르휘나’는 여왕이 될 운명으로 태어났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고향을 떠나 세계를 떠돌며 많은 경험과 고생을 하고, 여왕으로서의 자질을 연마한 후 왕위에 오르게 된다. ‘샤르휘나’의 여정은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후일 선덕여왕이 되는 덕만(이요원 분)의 모습과 닮아 있으니, 궁금한 이들은 일독해 보기 바란다.

 드라마 ‘선덕여왕’과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주인공들의 특징 중 하나는 신분이 왕족이라는 것이다. 시대물 속의 신분적인 우월함은 오랜 시간 동안 만화와 사극 드라마에서도 많이 보여준 극적 요소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신분적 우월함에 기대지 않고 오직 실력만으로 성공한 여자 캐릭터를 배출해낸 사극 드라마로 한류 드라마의 대표상품이 된 ‘대장금’을 떠올릴 수 있다. 주인공 ‘장금’(이영애 분)은 조선시대라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궁녀에서 의녀로, 다시 왕의 전속 주치의까지 되는 입지전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남자도, 신분제의 도움도 없이 본인의 힘으로만 얻어낸 성공이니 어찌 멋지지 않겠는가.

 김혜린 작가의 ‘불의 검’에서 ‘장금이’에 못지않은 캐릭터를 찾을 수 있다. 1992년 격주간 만화잡지인 ‘댕기’에서 첫 연재를 시작한 이 작품은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이동하는 기원 전 850∼700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평범한 산골소녀 ‘아라’를 중심으로 전쟁 속에서 살아가는 민초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산골소녀 아라가 우여곡절 끝에 철검 제조법을 배워 대장장이가 되는데, 전쟁 속에서 자신의 삶을 일구어 내는 모습이 작품 속 가득 배어 감동으로 다가온다. 특히 이 작품은 뮤지컬로도 만들어져 주인공을 비롯한 캐릭터들의 삶의 감동을 전해주었으니, 이 역시 한국 순정만화의 힘이라 할 수 있겠다.

 한국 순정만화는 하나의 장르로 계속 발전해 왔다. 아직도 사랑에 쉽게 눈물을 흘리는 여주인공들이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순정만화 같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한국의 순정만화 곳곳에는 자신의 두 발과 두 손만으로 모든 것을 이뤄내는 캐릭터들이 숨어 있으니, 한번쯤 그들을 찾아 보는 것은 어떨까. 한국순정만화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백수진 한국만화영상산업진흥원 만화규장각 콘텐츠 기획담당 bride100@parn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