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보는 세상] 어린이 만화가 없는 나라

[만화로 보는 세상] 어린이 만화가 없는 나라

 하나를 들으면 백을 배우는 길동. 어느 야심한 밤, 호부호형을 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답답해 뜰에서 검술을 연습하다 대감을 만난다.

 “왜 늦은 밤에 잠을 자지 못하느냐?” 길동이 답한다. “부친을 부친이라 못하옵고, 형을 형이라 못하오니, 어찌 사람이라 하오리까?” 2009년 한국에 홍길동과 같은 처지의 만화가 있다. 만화인데, 만화라 부르지 못한다. 길동이 아버지를 ‘대감’이라 부르듯 ‘학습’을 붙여야 된다.

 지난 7월까지 과학을 알기 쉽게 설명한 만화 ‘Why 시리즈’는 총 2500만권이 판매됐다. 과학의 힘일까, 만화의 힘일까. 아이들은 만화기 때문에 재미있게 읽고, 아이들이 재미있게 읽기 때문에 부모들이 2500만권을 사준 것이다. 물론 부모의 구매를 결정하게 만든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과학’이지만, 더 본질적인 원인은 어린이들이 만화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만화는 초기부터 어린이와 함께했다. 지금까지 발굴된 어린이 만화 중 초기작으로 꼽히는 안석주의 ‘씨동이의 말타기’는 1925년 잡지 ‘어린이’ 창간 2주년 기념호에 실렸다. 곡마단 구경을 다녀온 씨동이가 잠을 자다 말을 타는 꿈을 꾸었는데, 그만 꿈결에 아버지를 말로 착각해 타고 놀다가 혼이 난다는 이야기. 어린이의 일상과 웃음이 어우러진 우스개 만화다.

 우스개 만화에서 시작한 어린이 만화는 모험, 역사, 환상, 추리, 탐험, 스포츠 등 여러 장르로 발전하며 1960년대에는 만화방 만화로 1970년대에는 아동잡지의 부록으로, 1980년대에는 ‘만화보물섬’과 만화문고로 어린이 만화가 독자를 찾아갔다.

 주간만화잡지 시대가 시작된 1990년대 초만 해도 상당수의 만화는 어린이를 위한 것이었다. 1990년대 중반이 되어 독자들은 청소년으로 성장했고, 성장한 독자의 눈높이에 맞춰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던 격투, 판타지 만화들이 수입됐다. 잡지에 실린 한국만화도 일본만화와 비슷해졌다. 어린이 만화는 자연스레 시장에서 밀려났다.

 어린이 만화가 사라졌지만 어린이들은 여전히 만화를 원했다. 어린이들은 만화를 독해하며 그림, 이야기 그리고 연출이 주는 창조적 자극을 거쳐 성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린이를 위한 만화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부모는 일본만화에 대한 미디어의 흑색선전에 세뇌됐다. 그 와중에 어린이 만화가 ‘학습’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났다.

 경제위기 이후 돈이 우리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대. 어떤 가치보다 돈이 최고인 세상, 돈을 향한 욕망은 부모들의 학습강박증을 낳았고, 학습만화는 대번에 어린이 만화의 자리를 차지했다. 불과 10년 전의 일이다.

 우리에게는 만화를 보면 공부를 못하게 된다는 뿌리 깊은 신념이 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심전심이다. 그런데 진짜 그럴까? 과문해서 그렇겠지만 그와 비슷한 연구결과를 본 적은 없다. 만약 이런 식이었다면?

 어려서부터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지 못했거나, 선생님하고 잘 맞지 않거나, 집중력 장애가 있거나 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당연하게도) 만화는 잘 본다. 재미있으니까. 그런데 다른 이유들로 공부를 못하는 이 아이가 만화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어른들은 여러 원인을 무시하고 ‘만화를 보기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고 결론짓는다. 만화를 마녀로 만들면, 나(부모, 선생, 사회 등)에게 있는 원인을 들출 필요가 없으니까. 오히려 만화는 상상의 영역을 넓혀주는, 그래서 어린이의 성장과 치유를 도와주는 소중한 매체다.

 2009년 한국은 어린이 만화가 없는 나라다. 어린이에게 꿈과 상상력을 돌려주기 위해, 학습으로 위장된 어린이 만화가 아니라 진짜 어린이 만화가 필요하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과 교수 enterani@c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