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부품칼럼]시스템·부품 협력만이 살길이다

‘제61회 국제고체회로학회(ISSCC) 2014’가 지난 10일부터 13일까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됐다. 개막식부터 화두가 됐던 주제는 앞으로 정보통신기술(ICT) 분야를 혁신할 주체가 시스템 및 응용 분야와 소자·회로 등의 부품 분야 중 어떤 것일지였다. 의견이 분분했다.

유회준 교수
유회준 교수

확실한 사실은 근래 새로운 산업이 도래하는 사례를 살펴보면 이전보다 재료, 공정, 회로 등 원천 기술로부터 최종 소비자까지 도달하는 가치사슬(Value Chain)이 계속해서 길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로 대표되는 소자·시스템·소프트웨어의 3단으로 구성된 PC산업 생태계는 스마트폰 산업으로 넘어오면서 소자·시스템·통신사업자·앱소프트웨어의 4단 구성으로 길어졌다. 미래에 웨어러블 헬스 산업 시대가 도래하면 소비자·시스템·통신사업자·서비스제공자·건강전문가 등 생태계 내 참여자가 최소 5단 이상으로 한층 더 길어질 것이다.

가치사슬이 확장되면 연관 산업에서 창출되는 이윤을 나눠 갖는 당사자 수도 증가한다. 일각에서는 이로 인해 전체 산업에 대한 부품 기여도가 줄어들고 부품 산업이 가져가는 몫도 점차 줄어들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이해당사자가 다양해지면 전체 산업을 이끌어가는 주도권을 누가 잡는지에 따라 산업의 전개 방향이나 이익의 분배 기준 또한 달라진다. 최근 부품 분야는 계약에서 항상 ‘을’이 돼 불이익을 많이 받고 있는 형국이다. 앞으로 가치사슬이 더 길어지면 ‘을’이 아니라 이보다 못한 ‘병’이나 ‘정’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부품 산업은 어떤 대처를 해야 할 것인가.

나는 무엇보다 부품업체가 전체 시스템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부품을 벗어나 시스템이 요구하는 기술 기준(스펙)을 이해하고 있으면 기술 동향이나 시장 흐름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이고 부품업체 주도로 전체 산업을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도 가능하다. 시스템의 핵심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부품을 개발하면 이해관계가 아무리 다양해지고 관련 당사자가 많더라도 부품 산업만의 독자적 위상을 더욱 확고히 할 수 있을 것이다.

부품기업이 시스템기업과의 협력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부품 기반 시스템을 구축해 시장을 장악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서로를 단순한 이해당사자로 보기보다 협력자로 인정하고 공생을 도모해야 한다.

국가 출연 연구기관들의 역할이 재정립될 필요도 있다. 현실적으로 시스템기업보다 부품기업의 회사 규모가 작다 보니 기술 개발이나 상호 관계 형성에 적극적이기 어렵다. 이를 보조해주는 역할을 출연연이 담당해 서로를 경쟁구도가 아닌 협력관계로 이끌어야 할 것이다.

대학도 특허 등 원천 기술을 중소 부품기업에 공여해 이들의 신기술 확보에 도움을 줘야 한다. 중소기업도 이윤 공유를 통해 대학과의 상생관계를 구축하는 건 이를 위한 선결 과제다.

미래 산업의 경쟁력은 어느 국가가 이러한 시스템·부품의 협력 구조를 잘 구축했는지로 결정될 것이다. 미국·독일·일본 등은 이미 오래전에 자신들이 강점을 지닌 산업에 맞춰 각자 독특한 시스템을 구축했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날 기술 강국이 됐다.

최근 대두되는 웨어러블 컴퓨터 기술은 다양한 부품들이 융합해 하나의 응용 기술로 발전하는 산업이다. 결국 자신의 부품을 통해 시스템 기술을 선도하겠다는 모험적인 부품업체들의 활약 없이는 주도권을 잡기 어렵다.

한국은 우리만의 강점을 살릴 수 있는 독특한 협력 시스템을 신속히 구축해 세계 산업을 선도해야 한다. 부품기업들은 만년 중소기업으로 남아 있고 시스템기업만 세계적 대기업으로 나아가는 지금과 같은 방식은 세계 시장 선도라는 목표 달성에 걸림돌이 된다. 국가 차원에서 시스템·부품 협력 체제의 구축 및 관계 형성을 위해 힘을 실어줄 때다.

유회준 KAIST 전기 및 전자공학과 교수 hjyoo@ee.kais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