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훈의 디지털 확대경]파블로프의 개

[최정훈의 디지털 확대경]파블로프의 개

“이번에는 큰 떡을 준비해야겠군.”

1996년 어느 날 제보 한 통이 날아들었다. 삼성전자가 하드 디스크 드라이브(HDD) 애프터서비스(AS) 고객을 차별 대우한다는 내용이다. 당시는 삼성전자가 HDD 미국시장 확대에 총력전을 펼치던 때다. 미국과 일본 메이저 브랜드가 강점하고 있는 미국시장에서 삼성은 힘을 쓰지 못했다. 브랜드 이미지도 보잘것없었다. 단기간 미국시장에 파고들 방법은 저가(低價) 수출뿐이다. 그래서 삼성은 HDD를 국내 시세보다 훨씬 싼 가격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미국시장 확대가 아닌 내수 가격 폭락사태를 불러왔다. 사정은 이랬다. 미국시장 확대에 난항을 겪던 해외영업팀이 수출 목표를 채우고자 HDD 수출물량을 내수시장에 싼값으로 대거 쏟아냈던 것. 내수시장을 놓고 삼성전자 국내영업과 해외영업이 경쟁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졌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했던가. 값싼 수출용 HDD는 내수시장을 빠르게 잠식했다. 당연히 시장은 혼탁해졌다. 이른바 ‘삼성 HDD 역수입 사건’이다.

삼성은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했을까. 삼성의 해법은 황당했다. ‘역수입 HDD 무상AS 불가’ 결정을 내린 것이다. 내수 제품 구매자에게는 1년 무상AS 혜택을, 수출 제품 구매자에겐 그 혜택을 주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문제를 일으킨 건 회사인데 그 책임은 고객에게 떠넘기는 식이었다.

HDD AS 물량 대부분을 처리하는 용산AS센터로 갔다. 출입구 유리문에는 무상AS 불가 방침을 전하는 큼지막한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기자가 도착하기 한 시간 전에 붙은 대자보다. 취재를 시작했다. 센터장은 “본사정책”이라는 말을 남긴 채 황급히 자리를 떴다. 삼성전자 본사로 자리를 옮겨 취재를 계속했다. “뭔가 착오가 있었을 것이다. 확인해보겠다”는 답변이 나왔다. 등 뒤에서 대화가 들렸다. “된통 걸렸군. 이번에는 떡을 크게 준비해야겠어.”

그게 삼성식 해법이었다. 애석하게도 취재내용은 기사화되지 않았다. 삼성이 말한 그 대단한 ‘떡’을 받지도 않았다. 취재 시작 두 시간 만에 ‘역수입 HDD 무상AS 불가’ 결정은 철회됐고, 영문도 모르고 불이익을 당할 뻔했던 고객들의 불편이 일거에 해소됐으니 기사화할 이유가 사라진 탓이었다.

안타까운 건 그 떡이 초래한 오늘날의 심각한 부작용이다. 독이 든 떡에 중독된 자가 한둘이 아니다. 삼성 홍보블로그 ‘삼성투모로우’에 올라 온 광고성 글을 맹신하며 신문과 인터넷에 실시간으로 베껴 쓰는 사이비 언론과 기자도 부지기수다.

심지어는 삼성의 부조리를 지적한 타 언론을 향해 “삼성이 아니라는데 무슨 망발이냐”며 역공(逆攻)을 불사하는 삼성 대변인 격의 기자나 교수도 꽤 있다. 가관이다. 그들에게도 후배와 제자가 있을 테지만 수치심이란 온데간데없다. 오로지 눈앞의 떡에만 침을 흘리며 반응한다. 먹이 줄 때 울린 종소리에 조건반사하는 파블로프의 개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지난달 미국의 유력 경제지에 실린 ‘갤럭시S5 카메라 오류’라는 제목의 기사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만일 아이폰에서 이런 문제가 생겼다면 기자는 제목을 ‘애플은 운이 다했다(Apple’s doomed)’고 썼을 것이다.” 이국(異國)의 거대 광고주에 목을 맨 자국 언론을 질타하는 미국인의 쓴소리로 들린다. 부디 그것이 그 잘난 ‘떡’의 부작용이 아니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최정훈 정보산업총괄 부국장 jhcho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