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옆으로 본 우리 고대사 이야기

홍순만의 옆으로 본 우리 고대사 이야기 (1)

[칼럼] 옆으로 본 우리 고대사 이야기

예나 지금이나, 먹고 사는 게 문제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웃과 교류하고 이동하다가, 수틀리면 전쟁까지 한다. 생존은 상대가 있는 문제이고, 교류와 이동은 공동체 간의 관계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고대를 보면, 과연 얼마나 다르게 인식될까? 한반도, 중국대륙, 일본 열도의 사건들을 동북아시아 관계사 측면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물산의 교류와 사람의 이동을 기준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면 의외로, 그동안 기억의 저편에 방치된 것들이 살아난다. 인과관계로 엮이기 때문이다. 고대의 인과관계는 교류와 이동이 급증한 현대 역사에도 공히 적용될 수 있는 것들이기에, 그 의미가 더욱 깊다 하겠다.

우리 고대사에는 그동안 통설의 바깥에 방치된 사건들이 많다. 해방 이후, 여러 이유로 강역사(疆域史)에만 몰두해서인지, 유독 한*중*일 접촉면에서 발생한 사건들이 잘 설명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동북아 문명 건설에서의 동이족 역할, 신채호 선생이 주창한 삼조선과 삼한의 변화 과정, 고조선 수도와 한사군의 위치, 부여족 남하와 철제 왕국 가야와의 관계, 요서백제와 대륙백제 그리고 왜의 역할, 초원대국 고구려의 강역과 해양강국 백제와의 관계, 몽골의 기원과 고구려, 여진족의 기원과 신라 등이 그것으로, 모두 치열한 논쟁을 유발하는 사안들이다. 이제 위의 내용들을 교류와 흐름의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한반도는 중국대륙, 만주, 일본열도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삶의 공간이 그렇다는 말이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고대인들이 이동했고, 물산이 대륙과 해양 양쪽에서 교류되었다. 대륙공간은 만주와 요서에서 시작하여 유라시아 초원으로, 해양공간은 발해에서 시작하여 황해와 동중국해로 확대되었다.

초창기 물산의 주요 이동 공간은 발해였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 문명의 바탕이 된 에게 해와도 비견될 수 있다 하겠다. 그리고 발해로 유입되는 강들은 요즘 말로 물류 하이웨이였다. 요동 발원의 태자하와 혼하, 요서 발원의 대능하, 난하, 요하, 한반도 발원의 압록강과 청천강 그리고 중원을 거쳐 흐르는 황하 등이 그것이다. 강과 바다를 통해 만주, 한반도, 중국대륙 동안부 그리고 중원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교류의 확대는 큰 나라를 출현시킨다. 2년여 동안 한나라와 싸웠던 고조선은, 요서-만주-한반도 북부를 경제권으로 하여 한반도 중남부와 중국대륙과 빈번히 교역했던 큰 나라였다. 따라서 고조선의 수도는, 만주의 물산이 강을 따라 집결한 뒤 발해로 빠져 나가기 좋은 곳에 위치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리고 그곳은 한반도 남부와 만주 그리고 중국대륙과의 물산 이동로를 통제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을 것이다.

신채호 선생은 고조선 수도의 위치로 지금의 중국 요녕성 요양 부근의 해성시를 지목했다. 요하 하구에 삼각주 갯벌(요택)이 형성되기 전인 고대를 상정하면 쉽게 알 수 있듯이, 그곳은 요동 발원의 강들과 요하가 합류하여 발해로 흘러들던 길목이었고, 한반도와 대륙 물산이 오가던 발해 뱃길의 나들목이기도 했다.

발해의 경제적 패권을 두고 중국의 한나라와 동이족의 고조선이 부딪혔다. 안타깝게도 고조선이 패배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만주 송화강 유역과 한반도 전역으로 고조선 지식인들이 산포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미 BC4-5세기부터 고조선과 병립하고 있던 만주 송화 강변의 부여로 일부가 이동하고, 상당수는 서해 연안을 타고 한반도 중남부로 이동했다. 그에 따라 발해만과 남만주 일대를 지칭하던 마한, 진한, 변한이란 이름도 함께 이동한다.

마한, 진한, 변한은 고조선 수장(Khan) 들이 통치하던 강역의 이름이었다. 단군조선이 분화된 나라로, 汗, 干, 韓 등으로 음역되는 칸의 나라였다. 정치수장 마리가 통치한 마한, 군사수장 쇠블이 통치한 진한, 제사장 바리가 통치한 변한인 것이다. 신채호 선생은 조선사연구초에서 그것을 말조선, 발조선, 신조선으로 상정했는데, 마리는 말(馬) 혹은 정상이란 의미이고, 쇠블은 번쩍이는 청동무기, 그리고 바리는 무당을 의미한다.

마한, 진한, 변한이 이동하면서, 그 이름들에 내포된 태고의 기억도 함께 이동했다. 중앙아시아 발하슈 호에서 바이칼 호와 부리(부여)를 거쳐 발해로 이어졌던 북방 유목민의 기억이다. 쇠(金)는 그 기억의 정수리에 있던 상징물로, 한자로 음역한 진(辰)과 함께 이후 변진한, 대진국, 여진 그리고 신라, 금성, 쇠라벌, 서울 등으로 나타난다. 초기 가야가 동북아시아의 철제 왕국으로 기능한 것은 바로 쇠를 다루는 지식이 남달랐기 때문으로 보인다. 바리는 바리데기, 바리공주 등 현대국어에도 살아 있는 어휘로, 오늘날 남북한이 모두 보여주는 신기(神氣)의 원형으로 기능한다고 믿는다. 비록 발현 유형이 다르지만 말이다.

삼한의 원류인 고조선은, 북방 유목민들이 남하하여 만든 나라였다. 그런데 그 땅에 선주민이 있었다. 삼국유사가 시사하듯이 호랑이와 곰으로 상징되던 선주민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바다를 타고 올라온 남방 해양민이었다. 일찍이 인도와 인도네시아로부터 고인돌과 벼농사를 갖고 북상하면서 황해 주변 지역에 정착한 사람들이었다. 북방유목민에 의해 복속된 후에도 살아남은 남방계 여인들은, 북방 유목민의 이동로를 따라 중국 내륙과 한만지역으로 널리 퍼져갔다. 이는 여성을 통해서만 유전되는 미토콘드리아 DNA의 산포 과정과도 일치한다. 그들은 벼(禾)의 여인(女人)들이었다. 즉 왜(倭)다.

해양을 통해 끊임없이 유입되던 그들은 동북아 역사에 많은 흔적을 남긴다. 그들의 해상 활동 본거지는 한반도 서남부에 있었다. AD6세기경 백제가 왜의 본거지를 복속했을 때, 그들이 기능하던 중국대륙의 동안부 역시 백제의 강역이 되었다. 대륙 백제가 형성되는 역사적 사건으로 중국의 여러 사서들은 그때의 모습을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한반도 중남부에 출현했던 삼한 지역은 이후 백제, 가야, 신라로 재편되어 갔다. 편입되었는지 복속되었는지 아직 논쟁 중이지만, 그 기반 문화는 그대로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맏이를 자임한 고구려와, 바리의 적통을 주장한 백제, 그리고 쇠의 신라는 서로 대립했다. 그 중 고구려와 백제는 100여 년 동안 두 나라 왕이 전사할 정도로 치열하게 싸웠다. 중국대륙의 여러 나라들과 일본열도의 정권과도 치열하게 외교전을 펼쳤다. 둘 다 부여에서 파생된 형제의 나라인데도, 도대체 왜 그랬을까?

고구려는 물류의 바다, 서해로 진출하고자 했다. 그러자면 수도 집안에서 서해로 연결하는 압록강 수로를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했다. 집요한 노력 끝에 고구려는 313년 요동의 낙랑을 격파하여 압록강 수로를 장악했고, 요하 수로마저 견제해 들어갔다.

그러자 백제가 경악했다. 그것은 백제의 뿌리인 부여와의 해육상 교통로가 단절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백제의 근초고왕은 해양민(왜)과 연대하여 평양으로 북상했다.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투 중 사망(371년)했을 정도로 백제의 군사적 기동은 성공했다. 백제는 연이어 해상을 통해 요서에까지 진출하여, 만주의 부여-요서 백제-한성 백제-큐슈로 연결되는 물산 이동로를 확보했다. 중국 사서에 요서백제가 등장하는 시기이기도 하는데, 근초고왕은 375년 백제서기를 편찬하게 하여 자신의 업적을 기념한다.

당연히 고구려는 국가 혁신의 필요성을 절감했을 것이다. 고국원왕을 이은 소수림왕은 불교 수용, 태학 설치, 율령 반포를 통해 고대국가로서의 틀을 재정립한다. 그를 통해 배양된 국가적 역량은 20여 년이 지나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에 이르러 위대하게 발현된다. 고구려가 돌궐과 연대하고 중앙아시와도 교류하는 초원의 패자로 우뚝 솟은 것이다.

이후 우리 고대사는, 변방의 약소국 신라가 자강하고 중국이 통일되면서 역동적으로 전개된다. 돌궐-고구려-백제-왜 연합과 나-당 연합의 국제전 결과는 우리가 잘 알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백제 고구려 멸망 20여 년 전에 발생했던 세 나라에서의 극적인 정권 변동이 주목된다. 642년 고구려에 등장한 연개소문의 독재정권, 647년 비담의 난 결과로 신라에 등장한 진골-가야 연합정권 그리고 657년 백제 의자왕이 자신의 서자 41명을 좌평에 임명하여 왕 직할체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일본열도에서는 645년 백제계가 무너지는 대화개신이 일어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신라는 7년 동안의 전쟁 끝에 한반도에서 당나라 군대를 축출하여 삼한 통일을 이룬다. 그 과정에서 백제가 멸망했다고 하지만, 그들의 유산은 일본열도로 건너가 간무왕(桓武)에 이르러 다시 부활했고(신찬성씨록), 고구려가 망했다고 하지만 그들의 유산은 몽골로 유입되어 현재 몽골의 기원을 형성했다(몽골비사).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통일신라가 망했을 때도 왕족의 후손은 간도로 건너가 여진의 시조를 형성했다(만주원류고).

고대로부터 1000여 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근대의 굴욕과 분단의 비극을 감당해 가는 중이다. 그를 극복하는 지혜는 굳이 E.H.카의 정의를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 역사와의 대화로 찾을 일이다. 그 지혜의 한 꼭지가 대륙과 해양의 세계로 열렸던 유목민의 유산에 있다고 믿는다. 그것을 신기(神氣)의 디지털 노마드라고 한다면, 필자만의 지나친 상상일까?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필자소개/홍순만

한국IBM, 컴팩코리아, 한국HP를 거쳐 데이터베이스 회사였던 한국 사이베이스의 지사장을 역임하였으며, 하나로텔레콤(현 SK 브로드밴드)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하나TV(현 SK 브로드밴드 TV)를 출시하는 태스크포스를 이끌었다. 2011년 소셜 네트워크 분석 회사인 (주)사이람의 공동대표로 참여하여 재직 중이다. 2009년 ‘흠정 만주원류고’ 교정 작업에 참여하였고, 2010년에는 동아시아 관계 네트워크 속에서 우리의 고대사를 일람한 ‘옆으로 본 우리 고대사 이야기’란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