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스토리]<177>명랑소녀 호주 워킹홀리데이 탐험기

워킹홀리데이(워홀) 당시 호주를 여행 중인 글쓴이 `호진경`
워킹홀리데이(워홀) 당시 호주를 여행 중인 글쓴이 `호진경`

한 대학생이 단돈 180만원 들고 호주로 넘어가 워킹홀리데이(이하 `워홀`) 2년과 어학연수 1년을 거쳐 영어교사양성과정(TESOL)까지 수료해 돌아왔다. 아래는 그가 직접 쓴 경험담이다.

대학교 신입생이 되고 정신 없이 지나다 보니 벌써 대학교 3학년이 됐다. 그때 당시 나는 남들과 비슷하게 자격증을 준비하고 토익을 공부하며 평범한 나날을 보냈다. 한편으로 지루함을 느끼면서 뭔가 새로운 것을 원했다.

그때 뉴질랜드 이민자인 이모부가 워홀을 이야기했다. 돈을 벌고 여행을 하며 영어까지 배울 수 있다는 정보였다. 그 길로 부모님께 상의를 드렸으나 당시 해외에 한번도 나가본 적도 없고, 마냥 애기 같은 막내딸을 타지로 보내는 것에 반대했다. 철없고 추진력만 강했던 나는 부모님을 설득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학교를 휴학 후 비자를 발급받고 비행기표까지 발권해 부모님께 보여드렸다. 어렵사리 승낙을 받게 된 나는 호주에 가면 금세 일자리를 구해 여행을 할 수 있을 거란 허황된 꿈에 부풀었다.

그 동안 모은 180만원이란 돈을 들고 부모님을 뒤로한 채 친구와 함께 호주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모한 짓이었다. 마냥 들떴던 비행기 안과 달리 호주에 도착한 후에는 무엇을 하든 마음만큼 되지 않았다. 영어를 전공하기 때문에 처음에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한번도 해외로 나가본 적도 없고, 외국인을 보자마자 얼어붙은 입과 함께 쥐구멍으로 숨고 싶었다. 호텔 체크인하는 거 조차 쉽지 않았다. 열심히 생각해서 내뱉은 말에 돌아오는 대답이 “Sorry?” 또는 “Pardon?”일 때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영어를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인식당이나 카페에서 근무하면서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임금을 받았다. `이렇게는 더 이상 안되겠다`고 느낄 때쯤 한국인 친구가 일자리를 주선해주는 에이전시를 소개해줬다. 공장에 400달러만 내면 일하면서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달콤한 얘기에 이끌려 바로 계약을 했다. 실제로 간단한 면접만 보고 공장에서 일할 수 있었지만, 시련이 시작됐다.

워키홀리데이는 기대만큼 쉽거나 화려한 것은 아니라고 글쓴이는 경험을 통해 알게 됐다. ⓒ게티이미지뱅크
워키홀리데이는 기대만큼 쉽거나 화려한 것은 아니라고 글쓴이는 경험을 통해 알게 됐다. ⓒ게티이미지뱅크

공장에서 몇 개월간 일했다. 한인카페에서 일하는 것보다 2배 많은 임금을 받았지만, 내가 다른 외국인 직원들보다 시간당 5달러씩 적게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공장소속직원이 아니라 에이전시소속직원이란 이유에서였다. 그 길로 공장 사무실로 찾아가 대표에게 공장소속으로 계약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단칼에 거절당했다. 분하기도 했고 더 이상 에이전시 주머니에 돈을 넣어주기도 싫어서 아무 계획도 없이 무작정 공장을 퇴사했다.

퇴사 후 직접 공장직원으로 계약하겠다는 마음으로 일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구글에서 홈페이지가 있는 큰 공장들을 찾아 지역별로 15곳을 추려내고 2주 동안 호주 전역을 저가 중고자동차로 2000㎞가 넘게 뛰었다. 인사채용(HR)매니저를 만나서 직접 이력서를 넣었다. 몇 군데 회사에서 면접을 보고 싶다는 연락이 왔고 그 중 합격한 회사에서 워홀 마지막까지 일했다.

그곳은 한국인이 없었기 때문에 다들 나를 신기해했다. 단순한 외국인 노동자가 아닌 동료로서 나를 품어주며 떠나는 날 나를 위해 울어주었다. 돌이켜보면 운이 좋게도 그곳에서 소중한 인연들을 참 많이 만났다. 가족처럼 여겨 줬던 호주인 아주머니와 아저씨를 만났고 엄청난 수술비 때문에 치료받기를 주저했던 나를 직접 치료해주신 유일한 한국인 의사를 만났다. 이때 만난 인연들은 호주에서 있었던 3년 동안 이어졌다. 현재 한국에 돌아온 지금까지 메신저를 통해 이어가고 있다.

워홀을 하며 번 돈으로 호주의 많은 곳을 여행했고 크루즈 여행도 할 수 있었다. 또 남은 돈으로 1년 동안 어학연수를 했고 마지막엔 테솔을 수료할 수 있었다.

워홀은 단순히 일을 하고 여행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소중한 인연을 이어주는 `빨간 실`과 같다. 워홀은 소중한 추억과 인연을 만들어 주었고 평범하게 살았던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었다.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던 호주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꿈을 꾸고 삶의 의미를 찾았으면 한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많은 한국 청년들 또한 앞만 보고 빠르게 달리느라 숨 돌릴 여유가 없다. 그들이 더 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 도전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작성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마음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