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온뉴스 이소희 기자] 미디어의 시선은 곧 대중의 생각이 되고, 대중의 생각은 미디어의 시선이 된다. 미디어에서 빈번하게 다루는 소재와 장면은 무의식적으로 대중의 뇌리에 박히고, 미디어는 대중의 시선을 반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과거 드라마와 예능은 ‘여자는 이래야 하고 남자는 저래야 한다’는 고정된 성역할을 무의식적으로 그려냈다. 이제 그러면 돌을 맞을 지도 모른다. 최근 드라마와 예능은 성역할의 틀을 깨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 살림, 더 이상 여자의 것 아냐
지난 8일 첫 방송된 KBS2 예능프로그램 ‘살림하는 남자들’(이하 ‘살림남’)은 살림 초보부터 고수인 남자 연예인들의 리얼한 살림기를 담은 내용이다. 하루하루 일터에서 치열하게 버티는 남자들과 퇴근이 없는 집안일에 365일 시달리는 여자들의 입장 차이를 좁히고자 하는 의도다.
'슈퍼맨이 돌아왔다'(이하 ‘슈돌’)가 아빠가 육아를 하는 낯선 그림으로 흥미를 유발했다면, ‘살림남’에서는 육아를 포함한 '살림'이라는 큰 틀을 내세웠다. “2016년 대세는 살림하는 남자다” “살림하는 남자가 세상을 바꾼다” 같은 슬로건은 맞벌이 시대에 결코 살림은 주부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인식의 변화를 담고 있다.
‘살림남’에서 봉태규는 “‘살림을 도와준다’는 말은 혼나야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결혼을 같이 했으면 살림도 같이 하는 것”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시청자들은 격한 공감을 표하며 남자와 여자가 똑같이 일을 하지만 여자만 집안일을 하는 세태를 강하게 꼬집었다.
온스타일 예능프로그램 ‘런드리데이’는 빨래를 하며 고민을 나누는 내용이다. ‘빨래를 한다-더러운 것을 씻어낸다-힘든 일을 털어낸다’와 같은 3단계 논리는 단순히 예능적인 활용에 그칠 수 있다. 하지만 여성의 일이라고 생각되는 ‘빨래’를 중의적인 시선으로 풀어내며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데 일조했다.
◇ 능력녀의 화려한 등장
드라마는 사람 간 관계를 풀어나가기 때문에 남녀에 대한 해석이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다. 직업을 통해 여성의 높아진 위치를 표현하거나 여성의 것이라 여겨졌던 감정을 남성에게 투영한다. 아니면 오히려 편견에 갇힌 장면들을 보여주며 역설적으로 풀이한다.
먼저, 최근 방영된 드라마의 대다수 여주인공들이 전문직 여성이라는 점은 쉽게 간과할 수 없는 변화다. MBC ‘캐리어를 끄는 여자’에서 최지우는 아쉽게 변호사가 되지 못한 엘리트로, 프로페셔널하게 일하는 여성으로 나온다.
KBS2 ‘공항가는 길’의 김하늘과 ‘우리 집에 사는 남자’의 수애는 능력 있는 스튜어디스다. 종합편성채널 JTBC ‘이번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의 송지효는 직장에서 인정받고 야근도 불사하는 팀장이다.
물론 이전에도 의사, 선생님 등 전문직 여성이 자주 등장했지만 달라진 점은 여성의 능력을 보여주는 비중이다. 위에서 언급된 방송은 주인공들이 똑소리나게 일을 처리하거나 어려운 일이 생겨도 바로 해결하는 내공 있는 모습을 자주, 의도적으로 비춘다.
◇ 질투는 여자감정, 바람은 남자감정?
SBS ‘질투의 화신’에서 ‘질투’라는 감정은 극을 이끌어가는 중심소재다. 감정에 남녀구분이 어딨겠냐만, 누군가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모습은 남자답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여졌기에 자연스레 여성의 감정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질투의 화신’에서는 남자 둘이 여자를 두고 찌질하리만치 마음껏 질투한다. 오히려 여성이 양다리를 걸친다.
‘이번 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이하 ‘이아바’)도 마찬가지다. ‘바람을 핀다’는 행위에도 정해진 성별은 없지만, 여성이 바람을 피고 남자가 충격을 받는 그림은 지금껏 미디어가 흔히 보여주지 않았던 장면이다. 보통은 남자가 바람을 피고 여자가 힘들어하는 모습이 주로 그려진다. 그래서 극중 송지효의 바람은 좀 더 낯설게 다가온다.
두 드라마가 감정을 다루는 법은 기존 인식을 뒤집는 방식이다. ‘여자는 지고지순해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편견을 시원하게 깨뜨리며 경계를 흐리고 있다.
◇ 대놓고 보여주는 성차별의 역습
오히려 남녀가 지니는 고정적 위치를 직접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을 먹지 않는 이유는 그런 장면들을 통해 ‘잘못된 생각’이라는 걸 반증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공항가는 길’에서 김하늘의 딸은 축구부에 들고 싶어 하지만 그를 받아주는 학교는 없다. 딸은 ‘왜 여자는 축구부에 들어가지 못하냐’고 울며 발버둥친다. 학교와 같은 교육기관에서는 아직도 남자운동, 여자운동 등 편견의 잔재가 남아있다.
또 직장을 다니고 있는 김하늘은 살림을 하며 버거워한다. 드라마는 힘들게 비행을 마치고 와 묵묵히 청소를 하는 장면을 긴 시간 동안 보여주며 현실을 느끼게 한다.
하재숙이 친구 김하늘에게 해주는 말들, 김하늘이 제주도에 내려와 동네 엄마들과 나누는 이야기는 현재 여성의 위치를 더욱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하재숙은 김하늘이 자신처럼 일을 그만두고 엄마로서 희생하며 살아가길 원하지 않는다. 동네 엄마들은 아이를 낳기 전 자신의 직업을 떠올리며 ‘직장도 이름도 필요 없이 몇 등하는 누구엄마로만 남는다’고 허무해한다.
게다가 김하늘 남편 신성록은 자신은 끊임없이 새로운 여자를 만나고 다니지만, 막상 김하늘이 다른 남자와 만나자 길길이 뛰며 분노한다. 평소에는 김하늘과 딸에게 관심도 없다가 학업에 대한 지시만 일방적으로 내리던 사람이 말이다. ‘남자는 되고 여자는 안 된다’는 일부 인식이 드러나는 모습이다.
신성록이 보여준 남성성(으로 여겨지는 모습들)은 ‘이아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선균은 완벽한 아내를 뒀고, 자신은 살림을 ‘도와주기’ 때문에 이정도면 괜찮은 결혼생활을 있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라는 의문을 되풀이하며 아내의 외도를 100% 아내 탓으로 돌린다. 또 자신도 아내도 똑같이 결혼기념일을 잊어버렸지만, 일방적으로 섭섭함을 느낀다.
드라마는 아내가 힘들어했던 점을 하나씩 밝혀나간다. 아내는 갑자기 찾아온 시어머니에 불평 한 마디 하지 않는다. 회사에서 야근을 하다가도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오기 위해 뛰쳐나온다. 눈꺼풀이 감기는 피로에도 밀려있던 빨래를 개며 살림에 책임을 다하려 한다.
이 같은 ‘공항가는 길’ ‘이아바’ 장면들은 바람을 정당화하는 근거로써 사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부부, 즉 남녀관계에 자리 잡고 있는 뿌리 깊은 선입견과 불신을 보여주며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반증하고 있다.
김선영 평론가는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모순을 진지하게 탐색하는 매개라는 점에서 막장드라마의 선정적 단골 소재와는 다르다”며 “그간 상대적으로 소외되어온 여성의 성적, 사회적 욕망을 부각시키며 결혼제도를 근본적으로 돌아보게 하는 점도 돋보인다”고 말했다.
또한 “가족제도는 경력단절, 고용불평등, 금기시된 성적 욕망 등 사회 전체에 편재된 여성억압의 축소판일 뿐이다”라며 ‘이아바’ 속 부부의 균열은 하나의 뚜렷한 원인보다는 일상에서 ‘무심코’ 이뤄지는 성차별의 결과라고 분석했다.
전자신문 엔터온뉴스 이소희 기자 lshsh324@entero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