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 방향이 어슴푸레 윤곽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미래부 장관이 임명됐고, 과학기술 보좌관도 확정됐다. 과학기술 컨트롤 타워 일원화, 기초원천 연구개발의 미래부 통합, 미래부의 연구개발 예산에 대한 권한 강화 등 대선 기간에 언급됐던 과학기술인이 공감하는 정책 실현이 머지않았다는 기대가 크다.
하지만 아직 출연연 정책 얘기가 언론에 오르내리지 않고 있다. 물론 신중하게 검토해야 할 사안이다. 하지만 출연연은 전체 연구개발 예산 가운데 4분의 1 정도를 사용하는 곳이다. 매우 중요하게 다뤄야 할 사안이다. 출연연의 변화와 혁신은 국가 과학기술의 지속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 조건이다.
혁신 대상 가운데 가장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과제가 연구과제중심운영제도(PBS)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는 내용이다. 출연연 경쟁을 유도하기 위해 도입한 PBS 제도는 20년이 지난 현재 연구현장의 황폐화를 몰고 온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다.
PBS가 없어져야 연구자들이 관가를 기웃거리는 일이 없어진다. 연구기관에서는 연구자에게 과제 수주를 독촉하지 않아도 된다. 연구자 평가에 과제 수주를 비중 있게 넣지 않아도 된다.
연구원 능력 평가는 과제 수주가 아니라 좋은 연구 성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동안 많은 연구자가 과제 수주를 위해 제안서와 발표 자료를 작성하느라 많은 시간을 낭비해야만 했다. 선정 평가에 대비해 여러 부수적인 사항도 준비해야 했다. PBS가 없어져야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연구 환경이 조성될 것이다.
기업 및 대학과 경쟁 관계에서도 벗어나 협력 관계로 거듭날 수 있다. 대형 국책과제를 수행하는데 기업에 큰 부담을 주지 않고도 필요로 하는 기술을 공급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중소기업은 연구원의 높은 인건비 부담 때문에 망설였던 기술지원을 손쉽게 받을 수 있게 된다. 고가의 연구시설을 외국보다도 훨씬 싼 가격에 이용할 수 있게 돼 비싼 돈을 지불하면서 외국으로 나가지 않아도 된다. PBS를 없애는 것만으로 명실상부한 산·학·연 협력과 융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
연구원 인건비를 충당하기 위해 '과제를 위한 과제'를 만드는 풍토도 없어질 것이다. 정말로 국가가 필요로 하는 과제, 기업의 경쟁력 확보에 꼭 필요한 과제,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시급한 과제에 연구개발 예산이 사용될 것이다. 그러면 지금 20조원에 육박하는 연구개발 예산도 상당 부분 절약할 수 있다.
혹자는 PBS가 없어지면 연구원이 연구를 등한시 할 것을 걱정한다. 연구원들의 속성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현재 PBS 제도 아래에서는 그런 연구원 인건비도 모두 국가가 지불하고 있다. 오히려 인건비를 지불하기 위해 불필요한 연구 과제비만 덤으로 낭비되고 있는 상황이다.
귀중한 국민의 혈세가 이중으로 낭비되고 있는 셈이다. PBS는 가장 먼저 청산해야 할 연구계의 적폐다. 부분만 보완해서는 해결책이 못된다. 이번 기회에 PBS를 완전 폐지해 출연연의 미래를 향한 변화와 혁신을 이루는 전환점으로 삼아야 한다.
양수석 출연연연구발전협의회 총연합회장 ssyang@kar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