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30일부터 2월 1일까지 사흘간 일본 도쿄 빅사이트 전시장은 나노테크 재팬 2019(이하 나노테크)를 찾은 4만3000명의 방문객으로 가득 찼다.
이번 나노테크 재팬은 '울트라 스마트 사회를 실현하는 나노기술'을 테마로 삼고 카본나노튜브, 그래핀, 전지, 양자 어닐링(Quantum Annealing:양자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현상), 3D 프린팅 등 다양한 분야의 최신 기술을 소개했다.
울트라 스마트 사회는 일본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제5기 과학기술기본계획의 핵심이다. 사이버 공간과 현실 공간의 융합을 통해 모든 사람이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사회 건설을 지향하며 채집, 농경, 공업, 정보 혁명의 뒤를 잇는 다섯 번째 기술 혁명을 의미한다. 사이버 공간과 현실 공간을 한데 묶기 위해서는 세심한 감도의 센서와 구동장치가 꼭 필요한데 이러한 센서의 개발에 나노기술이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전통의 강호 카본나노튜브부터 새로운 얼굴, 양자 어닐링까지
카본나노튜브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고 28년이 지났다. 그동안 카본나노튜브의 물리적, 화학적, 전기적, 기계적 특성이 밝혀졌으며 더불어 카본나노튜브 제법, 분산법, 응용 방법에 대한 연구도 큰 진척을 이루었다. 이제 상업적 활용이 가능한 수준까지 발전했다는 평이 지배적이지만 아직 시장으로부터 기대했던 만큼 폭발적 반응을 끌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세계 최고 수준의 카본나노튜브 생산력을 자랑하는 다국적 기업 옥시알(OCSiAL)사가 순도 80%, 직경 1.2~2nm의 단층 카본나노튜브 '튜발(TUBALL)'의 대량 생산을 시작하자 기술력만큼은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던 일본 기업도 적잖이 당황한 눈치다. 세계 카본나노튜브 생산량의 90%를 차지하는 옥시알사의 압도적 물량 공세에 맞서 일본은 국립산업기술종합연구소(NEDO) 중심으로 컨소시엄을 구성해 재료 강국 일본의 자존심 지키기에 나섰다. 컨소시엄은 탄소나노튜브를 삽입해 섭씨 230도의 고열도 견딜 수 있는 공업용 오링(O-ring), 'SGOINT'를 개발하는 등 구체적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NEDO 컨소시엄은 그래핀 개발도 병행하고 있다. 초박막 플렉시블 전극, 터치패널, 필름 히터, 고감도 센서, 배선 재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래핀 소재 응용 가능성을 탐색하면서 미래 고부가 가치 산업의 주도권을 뺏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금년 나노테크에서는 신소재를 개발하는 톈진과 한국 기업이 공동 개발한 PET표면에 단층 그래핀을 합성한 투명 필름이 소개되기도 했다.
울트라 스마트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핵심 기술 중 하나인 전지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자동차 분야, 환경 에너지 분야 등 각 분야에서 가장 많은 출품자가 몰렸고, 매년 열리는 특별 심포지엄에서도 전지 분야 세미나에 가장 많은 670명의 관객이 참석하는 등 성황을 이루었다.
심포지엄에서는 산화물 계통 고체 전해질을 이용해 전고체전지를 제작하거나 산화 리튬이온 전도체를 개발해 전고체전지에 응용하는 등 주로 전지의 양극과 음극 사이의 전해질을 고체화하는 전고체전지 연구가 시선을 끌었다. 전고체전지는 액체전지에 비해 안전하지만 입자 간 계면 안정성이 떨어져 출력이 부족한 것이 한계다. 나노 구조체를 활용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산업적으로 매우 큰 가치를 창출할 것이 틀림없다.
새롭게 소개된 양자 어널링은 택배 배송 경로, 금융 포트폴리오, 전력, 통신 자원 제어 등 모든 시스템이 복잡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현대 사회를 가장 합리적으로 제어하는 최적 기술로 주목 받고 있다. 양자 어닐링 머신은 나이오븀이라는 금속으로 만든 링에 자기장을 가하여 만들어낸 전류의 흐름이 절대 영도에 가까운 극저온에서는 시계 방향과 반시계방향이 동시에 존재하는 '중첩' 상태를 이루는 것을 이용하여 양자 연산을 해낸다. 2015년 캐나다의 디웨이브시스템사가 양자 어닐링 머신을 제품화한 바 있다.
이번 나노테크에서는 NEDO와 와세다대가 양자 어닐링 기술을 이용한 '고효율, 고속처리를 위한 AI 및 차세대 컴퓨팅 기술 개발'의 공통 소프트웨어 연구를 발표했다. NEC도 초전도 파라메톤 소자를 이용한 양자 어닐링 기술 연구의 중간 성과를 소개해 많은 주목을 받았다. NEC는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을 대상으로 양자 어닐링 기술을 소개하는 공개 세미나를 개최해 큰 호응을 끌어냈다.
◇새로운 패러다임과 나노 비즈니스
모두가 사물인터넷(IoT) 시대를 말한다. IoT는 우리의 생활뿐만 아니라 기업 생태계까지 모조리 바꾸어 놓았다. 글로벌 시장은 다변화되었으며 비즈니스의 범위는 세계는 물론 사이버 공간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환경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미국의 거대 하드웨어 기업 IBM은 영업 실적 부진, 인재 유출에 골머리를 앓았으며 최고 수준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고 자부하던 일본의 전자기기, 액정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등의 산업도 큰 타격을 받았다.
머지않은 미래에 본격적으로 성장할 나노 시장에서도 위와 같은 전례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일본은 업계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 비즈니스 모델 교육에 매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나노테크 2019 또한 특별 심포지엄에 '울트라 스마트 사회와 오픈&클로즈 전략 및 지적 매니지먼트' 라는 주제를 선정하고 산학협력과 정책 연구의 전문가가 미래 시대의 비즈니스 모델에 대해 강연했다.
도쿄대학 정책 비전 센터의 오가와 코우이치는 울트라 스마트 사회로의 전환이 10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이며 기술력뿐만 아니라 산업 생태계의 아키텍트(구조)를 선점해야 할 타이밍이라고 강조했다. 마치 미국의 GAFA(구글, 애플, 페이스북)와 중국의 BAT(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가 현대인을 자신의 플랫폼에 귀속시켰듯이 비즈니스 파트너가 자신에게 의존하도록 경로 의존성을 구성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산학연대추진기구의 이사장을 맡은 경제학자 세노 켄이치로 역시 산업 생태계의 패러다임 변화를 강조했다. 그의 강연은 가격경쟁력을 갖춘 훌륭한 품질의 제품으로 세계 시장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일본의 장인 정신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그는 기술, 제도, 문화가 서로 맞물리며 사회를 구성해 나가는 것처럼 빅데이터, 인공지능(AI), IoT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삼위일체가 되어 산업계를 주도해 나갈 것이라고 예측했다.
빅데이터 없이는 AI가 없으며 AI 없이는 진정한 의미의 IoT를 구성할 수 없다. 나노 비즈니스도 마찬가지다. 전지, 컴퓨팅, 필름 등 여러 분야 중 한 가지 기술에 특화된 기업은 거대한 세계 기업의 하청 기업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선순환이 일어나는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라도 각 기업은 각자의 장점을 공유하고 연대해야 한다.
◇나노 시대의 본격적인 시작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울트라 스마트 사회에의 공헌'을 중심 테마로 삼은 이번 나노테크 2019에는 500명에 가까운 출품자와 4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참가했다. 본 행사는 나노기술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새로운 나노기술을 어떻게 비즈니스와 접목할 수 있을지 그 가능성에 대해 다각도로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나노테크 2019를 찾은 관람객 중 절반이 연구개발 인력이었으며 1% 남짓한 학생 참가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비즈니스, 경영 관련 인력이었다. 이는 일본은 나노시장 선점을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올해로 18회를 맞은 나노테크 재팬 2019는 일본이 얼마나 나노시장에 공을 들이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자리였다. 자신들의 기술 역량을 재확인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구체적인 나노 비즈니스를 고심하는 모습에서 나노 시대가 성큼 다가왔음을 체감할 수 있었다. 한국은 올해에도 24팀이 나노테크 2019를 찾아 해외 국가 중 참가자 수 1위를 달성했다. 그러나 재작년에는 37팀, 작년에는 29팀이 나노테크를 찾은 것에 비하면 계속해서 감소 추세다. 다음 나노테크 2020은 내년 1월 29일에서 31일까지 사흘간 도쿄 빅사이트 전시장에서 열릴 예정이다.
글: 이형석 과학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