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민 교수의 펀한 기술경영]<254>혁신에 필요한 여러 가지

'덕후'. 종종 사용하는 말이지만 이 말의 태생은 흥미롭다. 뭔가가 좋아서 미치듯 한 사람을 지칭하는 일본말에서 왔다. 그러나 의미 대신 발음을 땄다. 이렇게 나온 게 처음엔 '오덕후'였고, 이게 줄어 덕후가 됐다.

파생어도 있다. 바로 '덕력'이다. 어느 웹사전의 풀이를 빌리면 이것은 '덕후 공력'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오랜 시간 애정으로 반복하다 보면 내공은 무한대로 깊어지기 마련이다. 심지어 설명서에 소개되지 않은 기능까지 느낌으로 익히게 된다. 어느 명산의 온갖 등산로와 샛길을 다 섭력한 반 산신령이 되는 셈이다.

흔히 혁신은 새로운 뭔가라고 말한다. 그러니 창조란 단어만큼은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이건 잘 알려진 비경 품은 등산로 정도다. 모두 이 길 위에서 기업을 평한다.

사실은 다르다. 자기가 뭘 했는지, 뭘 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조차 흔하지 않다.

기업사에 제록스 만한 혁신기업은 진정 드물다. 팰로앨토연구소(PARC)라는 기업연구소 전형을 세운 것도 이 기업이다. 기술력에선 비교가 어렵다. 최초의 개인용컴퓨터(PC)라 불리는 것도 이곳 작품이다. 이름조차 제록스 앨토였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이 정도는 약과다. 그래픽사용자환경(GUI)도 이곳 태생이다. 파란 창에 명령어를 치던 세상을 바꿨다. 마우스로 클릭하면 프로그램이 열렸다. 팰로앨토를 방문한 스티브 잡스가 애플 스톡옵션을 주는 대신 받아 간 것이 이것이었다. 물론 앨토엔 버튼 세 개짜리 컴퓨터 마우스란 것도 달려 있었다.

여기에 레이저프린터와 이더넷, 워드프로세스 프로그램도 창조해 냈다. 그러나 애플의 대성공 곁에서 제록스의 컴퓨터 사업은 제대로 개시조차 하지 못했다.

문제가 있었다. 다른 혁신이 이 혁신을 쫓아가지 못했다. 기존 기업을 수요자로 생각했고, 그러니 새로운 고객이나 유통망을 만드는 건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기업을 상대하자니 워크스테이션 몇 개에 저장장치, 레이저 프린트까지 묶어 10만달러짜리 고객 제안이 됐다.

물론 잘 다져진 기존 성공 모델을 생각하는 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그러나 정작 제품에 어울리지 않았다. 값비싼 기업 전산기기를 다루던 기업이 금방 매킨토시 영업을 깨달을 수는 없을 테다. 기술을 제외하면 다른 혁신에 젬병이던 어느 기업은 새 제품을 고객에게 제대로 전달할 방법을 찾아낼 수 없었다. 여기다 제록스 프린터 시장도 점차 부진에 빠진다. 결국 시대 역작인 앨토도 버려진다.

제록스 컴퓨터가 성공할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은 흥미롭다.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론은 제록스가 몇 가지 퍼즐은 풀어내겠지만 전체 문제를 풀지는 못할 거라고 평가했다. 물론 팰로앨토연구소의 유산은 어도비 같은 다른 디지털 기업으로 살아남는다.

기업은 자신의 경험과 역량을 잘 알고 있을까. 대부분 그래야 한다. 내가 뭘 했는지를 꿰는 것부터 혁신이라 한다면 이건 분명 상식에 반하는 얘기일 테다. 그러나 다른 한편 놀랍도록 그 반대다. 정작 어디 뒀는지, 심지어 아직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우리와 무척 닮았다.
새로 창조하는 것만이 혁신이라면 그건 잘 닦인 등산로에서 본 풍경일지 모른다. 왠지 모르지만 내 경험은 이리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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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jpark@konk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