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민 교수의 펀한 기술경영]<333>혁신 라 치스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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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클(pickle). 식초와 소금물로 절인 채소를 말한다. 그러니 우리 음식 가운데 장아찌와도 좀 다르다. 피클 하면 오이가 떠오르지만 오이소박이와도 천양지차다. 물론 우리에겐 동치미나 짠지라 불리는 것도 있지만 결코 같다고는 보기 어렵다. 그래도 그 용처만큼은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공통점 가운데 무엇이든 오래 두고 먹으려는 목적이 낳은 결과물이다.

혁신에도 원칙이 있을까. 혹 원리라 부르는 것들과 비슷한 무엇일까. 그럼 혁신 원리가 만든 동심원들의 겹치는 부분일까 아니면 성공 원리들을 담아내는 그릇 같은 것일까.

디지털 카메라를 한번 떠올려 보자. 필름 카메라를 대체한 이유는 자명해 보인다. 필름 롤 하나하나를 현상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식이다. 그 덕에 우리는 더 많은 사진을 남기고 있다. 아이폰이 디지털 카메라보다 더 나은 이유도 자명하다. 사진 파일을 앱이든 내 웹 폴더든 업로드하기에 훨씬 쉽다. 그러니 카메라 성능이 더 나아도 스마트폰을 닮지 않는다면 운명을 바꿀 도리는 없다.

사진을 남기는 데 디지털 카메라는 필름 카메라에 비해 또 이걸 공유하는데 스마트폰은 디지털 카메라보다 더 저렴하게 나은 편리함으로써 더 나은 가치를 만든다. 물론 여기에 새로운 기술과 가치 제안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두 손에 든 것 가운데 하나는 책상 위에 두고 다른 하나는 서랍 안에 넣게 된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반면에 오히려 오래된 기술이지만 기술 기반 혁신이라는 어울리는 기술, 비즈니스 모델 및 전략이 만든다는 원칙도 작동한다. 피클(Piql)이란 기업이 있다. 데이터 보존이 주된 비즈니스다. 이들이 사용하는 기술은 셀룰로이드 감광 필름이라 부르는 것이다. 새 기술과는 거리가 멀다. 1880년대 개발됐다. 처음엔 사진, 나중에는 영화에 사용됐다. 그런데 이 기업이 제안하는 것이 흥미롭다. 디지털 데이터를 물리적인 사본으로 만들어서 보존해 주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한 500년 정도.

이 기업의 가치 제안은 데이터 보존이란 것이다. 데이터 보존은 사실 우리가 아는 것보다 기업에 큰 골칫덩이다. 문제는 '인터넷의 아버지'라 불리는 미국 발명가 빈트 서프(Vinton Cerf)의 '디지털 다크 에이지'를 떠올리면 쉽다.

지금 데이터 스토리지는 큰 비즈니스다. 데이터 양이 매년 40% 증가한다. 기존 데이터 저장 방식은 금세 구닥다리가 된다. 수시로 데이터를 이 장치에서 저 장치로 옮겨야 하는데 여기엔 큰돈이 든다. 이뿐만이 아니다. 당신 서랍 여기저기에 있는 오래된 플로피 디스크를 나중에 어떻게 할지 답이 없는 것처럼 옮기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사라지는 데이터도 많다.

훗날 특별한 기술 없이도 필름에 기록해 둔 데이터를 읽어 낼 수 있다면 그건 괜찮은 제안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피클의 제안은 새로울 게 없이도 혁신 원칙에 흠결 없이 부합한다.

플라멩코 음악의 기본 구성은 칸타오르(Cantaor)라 불리는 가수와 기타다. 꽉 채운 객석을 박수와 환호로 채울 수 있든 아니든 이 둘 없이 성립할 수 없다. 하지만 어느 섬의 새우란 이름의 가수와 플라멩코 기타의 안드레스 세고비아 격인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 한스러운 가사와 토해 내는 듯한 음색과 질주하는 기타의 매력을 알아챌 수 있었다.

혹 당신이 어디선가 길을 잃은 것 같을 때 한번 떠올려 보라. 기술 기반 혁신 원칙엔 꼭 뭔가 참신하고 새로운 것보다는 기술과 나머지의 '라 치스파(스파크)'에 있다는 걸.

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jpark@konk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