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온고지신]데이터를 넘어 기억 속으로

임재수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제4기환경연구센터장
임재수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제4기환경연구센터장

땅속에 쌓인 퇴적물을 힘들게 끄집어 올린 후 여러 분석을 통해 숫자로 표현될 수 있는 정보를 만든다. 그런데 이 숫자들은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우리가 잊으면 안 되는 누군가의 기억 일부다.

과거 기후변화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그 당시 기후 등 환경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과학적 해석이 가능한 그 무엇을 찾아야만 한다. 그린란드와 남극 빙하 속에서 캐낸 얼음기둥 모양 '빙상 코어' 속에는 이러한 전 지구적인 기후변화 정보가 많이 들어 있다.

얼음 속에 들어 있는 산소 동위원소 정보는 과거 그린란드 상층 대기 온도 변화를 보여준다. 얼음 속에 포함된 이산화탄소 기체는 그때 이산화탄소 농도가 어떻게 증가했는지, 또는 감소했는지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복합적인 과거 기후정보는 기후변화가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에 대하여 평가할 수 있는 인과(因果) 정보를 제공해준다.

마찬가지로 한반도에 비가 얼마나 왔는지, 가뭄은 얼마나 자주 있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땅의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다. 필자는 과거 고흥만 일대 연안 범람이 얼마나 자주 있었는지 연구한 적이 있다. 남해안 고흥만에 쌓여 있는 약 10m 두께 연안 퇴적층을 이용해 약 9000년 동안 나타난 수문(水文) 변화를 추적 연구했고, 과거 수문변동 주기성 정보를 제공하는 좋은 결과를 얻었다. 구체적으로 과거 남해지역의 수문 변화는 약 1500년, 780년, 140년 주기로 범람이 잦은 높은 홍수기와 비가 적게 오는 가뭄기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후속 연구를 통해 이러한 주기를 나타내는 시계열적 변화가 단순한 숫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 지질기록 기반 과거 수문 변화 정보를 역사시대 기후변화와 자연재해와 비교하는, 즉 고증을 통한 지질 기록체 검증이라는 새로운 연구를 시작했는데 결과가 상당히 재미있다. 고흥만에 기록돼 있는 수문 변화는 지금부터 약 500년 전에 홍수 빈도가 감소한 매우 가물었던 가뭄기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반대로 약 800년 전에는 연안 범람이 매우 잦은 홍수기가 나타났을 것을 알려준다.

상대적으로 현재와 가까운 가뭄기와 홍수기는 역사 기록 속에서 여러 자연재해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약 200~700년 전은 소빙기라고 해서 춥고 건조한 기후로 알려져 있는데, 우리나라 역사서에도 이 시기에 극심한 가뭄에 의한 피해 상황이 많이 기록돼 있다. 특히 한국 역사상 전대미문 기아 사태를 발생시킨 경신대기근이 1670~1671년 2년에 걸쳐 있었는데, 이때 조선시대 전 인구 약 20%가 사망했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가혹한 피해 상황이 너무 아프게 묘사돼 있어 과거에 우리 선조들이 겪은 고난과 어려움에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우연일지 모르지만 소빙기 초기에 가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측우기가 발명됐고 전국적인 우량관측망이 시작됐다는 사실은 극심한 가뭄에 대한 선조들의 급박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이와 반대로 고려시대 기록은 약 900~800년 전인 1100~1200년에는 가뭄이 적고 습윤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잦은 연안범람을 보여주는 연안퇴적층 기록과 잘 일치한다.

역사적인 사실과의 일치성은 지질기록체에 나타나는 그보다 더 이전 수문변동을 해석하는데 중요한 신뢰성을 제공한다. 즉 지질기록체에 기록된 약 1500년 전 강력한 홍수기는 삼국시대 특히 남해 연안에 살았던 백제, 신라 백성들에게 큰 어려움을 가져다 준 시대임을 알 수 있다. 비록 세세하게 역사기록에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것들과의 비교·분석을 통해서 지질기록체의 정확성을 확인하고, 과거 어려운 환경에서 살았던 조상들의 삶의 흔적을 들여다볼 수 있다.

기억은 지혜의 또 다른 이름이다. 올해부터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서는 'Geo측우기 기반 고수문기후 극한사상 연구'라는 주제로 과거 수문변화 복원 연구를 시작했다. 우리나라 여러 지역에 분포하는 호수·습지·연안 퇴적층을 과거 수문변화가 기록된 Geo(지질) 측우기로 활용하는 연구 프로젝트다. 기후변화라는 과거의 기억을 되찾아 미래 기후위기에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는 유의미한 자료 생산을 기대해 본다.

임재수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제4기환경연구센터장 limjs@kigam.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