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섭의 디지털 단상]법은 쉽게 소비되어야 한다

[김태섭의 디지털 단상]법은 쉽게 소비되어야 한다

지난해 12월 서울행정법원은 청각장애인인 A 씨가 부당하게 겪은 행정소송에서 Easy-Read 방식을 도입해 판결문을 작성했다. Easy-Read는 짧고 쉬운 어휘와 그림 등을 활용해 장애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작성한 판결문을 말한다. 판결문 주문은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와 같이 알기 쉽고, 친절한 표현을 덧붙였다.

법이란 모든 사람이 이해하고 따를 수 있는 일련의 규칙을 말한다. 특히 민주사회에서 법은 정의와 공평을 실현할 절대적 도구로, 법률의 주인은 국민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많은 사람에게 법은 혼란스럽고, 권위적이며, 접근하기 어렵다. 결국 법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더 많이 이해한 사람에게 휘둘릴 것이고, 더 가혹한 처벌을 받을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민사소송의 80%, 형사소송의 46%가 셀프 소송, 즉 나 홀로 소송이다. 전자소송제도 도입, 로톡과 같은 리걸 플랫폼의 등장은 법률 문턱을 확 낮추었다. 나 홀로 소송은 더욱 늘 것이다. 챗GPT 등장은 개인의 대응 능력을 크게 향상해서 전문가 입지는 더욱 줄어들 것이다. 나 홀로 소송이 급증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첫째는 비용, 둘째는 접근성이다. 여기서 우리는 접근성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대한민국 법률시장에서 접근성이 가장 떨어지는 분야가 공증이다. 우리는 흔히 “공증했어?”라고 묻곤 하는데 막연히 대항력을 충분히 갖춘다고 생각한다. 실제 공증은 매우 유용한 제도다. 예방사법이라는 어려운 접근은 둘째치고 사회적 갈등을 크게 해소할 수 있다. 즉 증명력·집행력(재판 없이 강제 집행 가능)이라는 막강한 권한으로 일어날 분쟁을 예방한다. 모든 다툼이 그렇듯 재판은 패자를 남기고 갈등은 지속된다. 이러한 장점에도 공증 건수는 해마다 줄고 있다. 1990년대 300~400만건이던 공증이 2003년 720만건으로 정점을 찍었고, 이후 우하향하며 2019년에는 274만건이 됐다. 공증사무소 또한 해마다 줄고 있다.

한국인의 미덕을 은근과 끈기라고 하지만 민족의 특성을 대표하는 단어는 단연 '빨리빨리'다.

웹사이트가 5초안에 열리지 않으면 닫아버리는 민족이다.

문제는 법이다. 공증인법에 따르면 촉탁인은 공증인 앞에 출석해야 한다. 덧붙이면 증서 작성 시 공증인이 촉탁인을 출석시켜서 신원을 확인하고, 공증내용을 설명하고, 서명을 확인해야 한다.

한국의 공공서비스는 빠르게 진화했다. 과거에는 민원인이 행정 관청을 돌며 서류를 발급받아야 했지만, 지금은 인터넷에서 원스톱 처리된다. 법률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법무부는 2005년 전자어음을 도입했고, 2009년 주주총회에서 전자의결권 행사가 가능하도록 했으며, 전자소송제도를 도입했다. 의료계는 또 어떤가, 건보공단은 전자처방제도를 도입했고 20년 금기 원격진료마저 허용했다.

위헌 소지도 엿보인다. 전자서명법 제3조를 보면 '전자서명은 전자적 형태라는 이유만으로 서명, 서명날인 또는 기명날인으로서의 효력이 부인되지 아니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즉 촉탁인을 출석시키는 공증인법에 배치된다. 전자서명은 이미 일상화했다. 민간 플랫폼 기업이 수백 곳에 이르고, 수십만의 공공기관·기업 등이 이 서비스를 이용한다.

인터넷에 묻고 인터넷이 답하는 시대다. 전자문서 성립을 위한 촉탁인의 출석은 시대착오적이다. 문서의 서명까지 확인해 주는 친절(?)한 서비스는 국민 무시, 국민 불편만 안길 뿐이다. 시공간 제약 없이, 단 몇 분 만에 공증업무를 온라인에서 처리할 수 있는 전자공증 플랫폼이 구축된다면 우리의 일상은 획기적으로 바뀔 것이다. 다툼을 예방하고, 사회 갈등을 해소하며, 사법권 낭비도 최소화할 수 있다. 대한민국 법관은 한 해 재판을 2300여건 처리한다. 이는 사회적 충돌도 없다. 민원인·공증인 모두 윈윈 구조로, 최근 변호사단체와 다투고 있는 로톡 서비스와 다르다.

신뢰가 높아지면 사회비용은 낮아진다. 리걸테크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공증이 사람 목숨보다 소중할 수 없다. 즉 명분과 실리 놓칠 것이 없다. 정부든 민간이든 상관없다. 현행법과의 충돌은 규제샌드박스라는 유용한 제도가 있다. 누구든 용기를 내어 나서면 된다. 법률시장의 네이버가 탄생하길 기대해 본다.
김태섭 법무법인 대륙아주 고문 tskim2324@naver.com

[김태섭의 디지털 단상]법은 쉽게 소비되어야 한다

〈필자〉1988년 대학시절 창업한 국내 대표적 ICT경영인이다. 바른전자 포함 4개 코스닥기업을 경영했고 시가총액 1조원의 벤처신화를 이루기도 했다. 반도체, 컴퓨터, 네트워크 SI 등의 전문가로, 그가 저술한 '규석기시대의 반도체'는 대학교제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상장사 M&A플랫폼인 피봇브릿지의 대표 컨설턴트이며, 법무법인(유한) 대륙아주 고문, (사)한국M&A투자협회 부회장 등을 겸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