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대학포럼] 〈172〉일의 심폐소생술이 필요하다

장원섭 연세대 교육학부 교수
장원섭 연세대 교육학부 교수

미국 갤럽이 전 세계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의하면 약 59%가 '조용한 퇴사자'였다. 열명 가운데 여섯명 가까이가 최소한의 업무만을 수행하면서 자리에 버티고 앉아있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사직을 공개적으로 떠벌리는 '요란한 퇴사자'도 18%에 달했다. 중국에서는 직장에 불만을 표출하기 위해 잠옷을 비롯한 기괴한 복장으로 출근하는 '역겨운 출근룩'까지 등장했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다. 4월 인크루트가 국내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절반 이상이 '조용한 퇴사' 중이라고 응답했다. 인터넷에서는 회사를 그만두는 과정을 낱낱이 보여주는 '퇴사 브이로그'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근래에는 의대 정원의 확대 가능성에 따라 직장인들 사이에서도 의대 준비 열풍이 불고 있다. 반면, 비교적 오랫동안 편하게 일할 수 있을 것 같아 인기를 끌었던 공무원과 교직은 낮은 연봉과 악성 민원 탓에 그 인기가 시들해졌다.

일은 개인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경제 활동이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 제품이든 서비스든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제공하는 사회 활동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일하는 과정과 결과에 자기 자신을 담아내며 자아실현까지 도모할 수 있다. 단지 먹고살기 위한 노동이 아니라 의미 있게 일한다면 말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일을 에스프레소에 비유했다. 에스프레소가 쓰지만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깊은 풍미와 짙은 향을 느끼기 때문이다. 더 많은 이들은 크림을 얹어 카푸치노나 카페라테를 만들어 마신다. 물론 크림만 걷어 먹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다가는 금세 건강을 잃게 될 것이다. 근래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일로부터의 도피 현상이 에스프레소 없는 크림만 먹으려는 풍조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너무 긴 노동시간으로 인해 삶의 균형이 무너지는 걸 막으려면 '워라밸'이 꼭 필요하다. 쓴 에스프레소와 달콤한 크림이 균형을 이뤄야 한 잔의 맛 좋은 커피가 만들어진다. 그렇다고 일 밖의 행복만을 좇아가며 일을 삶 밖으로 내모는 우를 범하지는 말아야 한다. 일도 나의 소중한 삶의 일부다. 일하는 동안에도 기쁨과 보람을 찾을 수 있어야 삶 전체가 온전히 행복해질 수 있다.

일을 삶으로부터 분리할 수는 없다. 일은 일상을 망가뜨릴 수도, 삶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도 있다. 치열한 경쟁과 성과에 집착하면서 흐려진 삶의 경계로 인해 소진되는 대신, 의미 있게 일하며 성장하고 마침내 성숙하는 진정한 일의 가치와 참된 삶의 행복을 실현할 수는 없을까?

일이 가진 본래의 의미를 상실할 위기에 처한 지금, 일하는 사람의 롤모델이라 할 수 있는 현대적 장인(匠人)과 그들의 장인성(匠人性)에 주목해 보자. 장인은 자신의 일에서 보람을 느끼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갱신하며 일의 깊이를 더한다. 그저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 어제보다 오늘 더 성장하는 기쁨을 누린다. 배움을 축적해 가는 과정에서 때때로 얻게 되는 작은 성취를 맛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는 더 큰 정상을 경험한다. 그렇게 일하는 삶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의의를 실현한다.

조직에서 소모되며 지친 마음으로 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는 직장인들이 일하는 삶의 진정한 의미와 올바른 가치를 세우기를 바란다. 불공정한 직장과 경제사회구조에 문제 제기하며 노동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자신의 일하는 삶에 대해서도 깊이 성찰해 보기를 바란다. 어떡해서든 일에서 도망치려고만 하고 있는지, 아니면 진정으로 의미 있게 일하며 삶을 살아가려 하는지. 위기의 직장인에게 진짜 시급한 건 자신의 일하는 삶을 심폐소생하는 것이다. 일을 살아 숨 쉬게 만드는 힘인 장인성을 조금씩이라도 쌓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장원섭 연세대 교육학부 교수 wchang@yonsei.ac.kr